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니까 당연히 사회 비판 메시지가 있겠거니 했는데, 이 영화는 그 수위가 꽤 직접적이었습니다. SF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보는 내내 현실 어딘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웃으면서도 뒷맛이 좀 쓴 영화였습니다.
영화 <미키 17> 계급 풍자: 우스꽝스러운 독재자가 진짜로 말하는 것
저도 처음엔 케네스 마샬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선거에서 떨어진 전직 국회의원이 우주 식민지 탐험의 책임자가 되어 '순백의 행성'을 만들겠다며 황당한 명령을 남발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 만화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마샬이 바보처럼 보이는 건 그가 진짜 무능해서라기보다, 그를 그 자리에 앉힌 시스템이 원래부터 그런 인물을 걸러내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을 분석한 연구들이 있는데, 권위주의적 리더십(authoritarian leadership)이 조직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무능한 지도자일수록 주변에 비판 없이 복종하는 구조를 만든다고 합니다. 여기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란, 의사결정이 수직적으로만 이루어지고 구성원의 자율성이 철저히 억압되는 조직 문화를 말합니다. 영화 속 승무원들과 연구원들이 미키의 죽음에 완전히 무감각해진 모습이 바로 이 구조의 결과처럼 보였습니다.
마샬의 배우자 일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체제 선전에 동원되며 허영심과 사치로 가득한 이 캐릭터는, 독재 권력이 혼자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이 두 인물을 같이 붙여놓은 것, 그게 봉준호의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제 인간 설정이 말하는 노동과 소모
영화에서 익스팬더블(Expendable)은 말 그대로 소모 가능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익스팬더블이란, 위험한 임무에 반복 투입되며 죽어도 복제본으로 교체되는 계약직 인간을 뜻합니다. 미키는 죽고, 프린트되고, 기억을 이식받아 다시 죽는 과정을 17번이나 반복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미키가 죽은 직후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인물들이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장면이었습니다. 죽음이 단순한 업무상 사건처럼 소비되는 그 분위기가 불쾌하면서도 웃겼고, 그게 이 영화가 노리는 정확한 감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장르 설정을 빌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디스토피아란 사회 제도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미래 사회를 묘사하는 문학·영화의 장르적 개념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틀 안에서 복제 기술이라는 SF적 요소를 활용해, 오늘날 플랫폼 경제나 비정규직 구조에서 노동자가 경험하는 '대체 가능성'의 공포를 시각화했습니다.
미키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건 그가 이 상황을 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심드렁하게 받아들이는 체념의 태도가,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까"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배우에 대해 여전히 할리우드 로맨스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가진 특유의 모호함이 정말 잘 맞아떨어졌다고 봅니다.
미키라는 캐릭터는 완전한 영웅이 아닙니다. 저항자도 아니고, 체념한 패배자도 아닙니다. 감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물인데, 패틴슨은 그 모호한 정서를 표정 하나, 톤 하나로 굉장히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애매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는 게 사실 완전한 악당이나 영웅을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멀티플(Multiple)이라는 설정, 즉 한 명의 익스팬더블이 두 개 이상의 복제본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패틴슨이 미키 17과 미키 18이라는 두 버전을 각각 다른 온도로 연기하는 장면은 꽤 볼 만합니다. 미키 17은 체념에 가까운 순함이, 미키 18은 자기 생존 본능에 솔직한 직설적 태도가 강한데, 같은 배우가 이 둘을 한 화면에서 다루는 방식이 영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패틴슨의 연기가 봉준호 감독의 각색 방향을 버텨주는 핵심 기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은 황당하지만, 그 안의 인물이 설득력을 가지니까 영화 전체가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봉준호의 선택: SF의 가능성과 포기 사이
이 영화를 둘러싼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SF 장르 특유의 존재론적 질문, 즉 복제된 자아는 원본과 동일한 인격을 갖는가, 기억의 연속성이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는가 같은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길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다소 표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존재론적 질문이란, 인간의 본질이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말합니다. SF 영화에서는 AI, 복제 인간, 기억 이식 같은 소재를 통해 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질문을 주제로 삼되, 직접적인 철학 탐구보다는 계급 풍자와 정치 우화 쪽으로 무게를 기울였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대와 달라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영화 비평 전문 매체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작품은 기존 봉준호 영화의 팬층에게는 친숙한 문법이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관객이 무엇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SF의 철학적 밀도를 원한다면 아쉬울 수 있고, 봉준호식 풍자극을 원한다면 충분히 통렬한 영화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게 즐겼지만, 전자의 기대를 가진 분들의 실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자체가 남긴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관람 후에도 한동안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역할을 한 셈입니다. 원작인 에드워드 에쉬의 소설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이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