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어릴 때는 부모가 알려주는 세상이 거의 전부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아직 직접 겪어본 일이 많지 않으니 부모의 말을 믿는 편이 훨씬 편하다. 세상을 먼저 살아본 사람이 알려주는 길이라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안전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도 그런 아이였다.
바이킹이 사는 버크섬에서는 드래곤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스토이크는 강한 바이킹이었고, 아들에게도 그런 모습을 기대했다. 실제로 스토이크는 버크를 지키는 강인한 족장이자 전사로 그려진다.
하지만 히컵은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힘도 부족하고 싸움도 서툴다.
대신 무언가를 만들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히컵은 누구도 잡지 못했던 드래곤을 공격한다.
그리고 숲속에서 그 드래곤과 마주한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자신이 배워온 이야기 속의 괴물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고 경계하면서도 히컵의 행동을 지켜보는 한 마리의 드래곤.
투슬리스였다.
그 순간부터 히컵이 알고 있던 세계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부모가 정해준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을 중심에 놓고 영화를 다시 보니, 히컵의 모험이 단순히 드래곤을 길들이는 성장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믿어왔던 기준을 처음으로 의심하고,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과 내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히컵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는 어쩌면 드래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스토이크는 아들을 사랑한다.
다만 사랑하는 방식이 히컵에게는 버겁다.
강한 전사가 되어 마을을 지키길 바란다. 스토이크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문제는 히컵이 그 세계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보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는 데 관심이 있고, 싸우는 것보다 무언가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다.
그런 아이에게 “강해져야 한다”는 말은 격려보다 압박에 가까울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대개 악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너에게 좋은 길이니까.”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고, 좋은 학교에 가길 바라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기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정말 이걸 원하는 걸까?
히컵도 비슷했다.
마을 사람들은 드래곤을 죽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버지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데 히컵만 조금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한다.
그 계기가 된 존재가 투슬리스다.
숲에서 만난 투슬리스는 히컵이 들어왔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서운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드래곤에게도 두려움이 있고, 경계심이 있고, 호기심이 있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은 존재였다.
히컵은 그것을 직접 본다.
그래서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정말 전부였을까.
이 장면을 다시 볼 때마다 이상하게 긴장이 풀린다.
처음에는 투슬리스가 언제 공격할지 몰라 화면을 계속 보고 있는데, 히컵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고 투슬리스가 조금씩 경계를 푸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거대한 드래곤과 바이킹 소년이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장면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 “네 아버지의 생각이 틀렸어”라고 알려준 것이 아니다.
히컵 스스로 보고 경험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투슬리스와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진다.
히컵이 투슬리스를 길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이 서로에게 적응한다.
히컵은 드래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투슬리스는 인간을 믿어도 되는지 확인한다.
처음에는 거창한 우정이 아니다.
손을 내밀어 보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고, 상대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 작은 순간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길들이기’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
누군가를 내 뜻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낯선 부분을 알아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히컵의 진짜 변화는 몸이 강해지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드래곤을 적이라고 배웠던 아이가 드래곤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왜 공격하는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알아간다.
힘으로 누르는 대신 상대를 살핀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 답을 부모에게 배웠다면 더 그렇다.
어릴 때 부모가 알려준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위험한 사람인지, 어떤 선택은 옳고 어떤 선택은 잘못된 것인지도 그 안에서 배운다.
그런데 직접 살아보면서 알게 된다.
부모가 알려준 세상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묘한 죄책감도 따라온다.
‘내가 부모님의 말을 믿지 않는 건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히컵도 아버지의 믿음과 자신이 직접 경험한 현실 사이에서 흔들린다.
스토이크 역시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에게 드래곤은 오랫동안 가족과 마을을 위협해온 존재다.
평생 믿어온 적에 대한 생각을 아들이 나타났다고 쉽게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충돌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히컵에게는 눈앞의 투슬리스가 있다.
전설 속의 괴물이 아니다.
숨을 쉬고, 장난을 치고, 상처를 입고, 자신을 믿기 시작한 존재다.
스토이크에게는 여전히 마을을 위협해온 드래곤이라는 집단의 기억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대상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경험은 때때로 오래된 믿음보다 강하다.
히컵의 성장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이가 되는 과정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가깝다.
부모의 세계를 부정해야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를 충분히 이해한 뒤,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꿀지 선택하는 것.
그게 히컵에게 찾아온 진짜 성장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히컵의 방식이 단순히 ‘착해서’ 옳은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히컵은 실제로 관찰한다.
드래곤을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살피고, 그들의 특징을 기록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이용해 관계를 만들어간다.
남들이 힘이라고 부르는 것을 히컵은 지식과 호기심으로 대신한다.
그것이 결국 그의 가장 큰 강점이 된다.
부모가 정해준 세계 밖에는 내가 선택한 하늘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히컵과 투슬리스가 함께 하늘을 나는 순간이다.
구름 사이를 지나고, 바다 위를 날고, 투슬리스의 움직임에 맞춰 히컵이 몸을 기울인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눈이 따라가고, 두 캐릭터가 구름 사이로 떨어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같이 날고 있는 것처럼 잠깐 어지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그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는 화면 때문만은 아니다.
히컵은 이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다.
다친 투슬리스에게 필요한 건 더 강한 날개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꼬리 날개를 대신할 장치가 필요했고, 히컵은 그것을 만들어낸다.
투슬리스 역시 히컵의 도움이 있어야 제대로 날 수 있다.
둘에게 부족한 부분이 서로를 통해 채워진다.
이 관계가 좋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히컵은 마을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대했던 모습과도 달랐다.
대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
살다 보면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계속 연습하면서 힘들어질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잘하는 것을 나도 해야 할 것 같고,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길에서 벗어나면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과 내가 원하는 모습이 다를 때는 더 어렵다.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히컵은 그 사이에서 자기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대가도 따른다.
마지막 전투에서 히컵은 투슬리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를 잃는다. 이후 의족을 사용하게 된다.
이 결말이 인상적인 이유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히컵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대신 그 선택의 흔적을 몸에 남긴다.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이 부분에서 잠깐 멈칫했다.
처음 하늘을 날던 장면에서는 그렇게 자유로워 보였던 히컵이 마지막에는 한쪽 다리를 잃은 모습으로 서 있다. ‘자기답게 산다’는 말이 예쁘게만 들리지 않았던 순간이다. 선택에는 실제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 꽤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토이크와 히컵이 다시 마주하는 장면이 더 오래 남는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감정이 담겨 있다.
히컵 역시 더 이상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또 하나 마음에 남았던 것은 스토이크가 히컵의 달라진 모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직접 바라본다.
그제야 히컵의 약점처럼 보였던 것들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힘이 부족했던 아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되었고, 말썽만 일으키던 아이는 마을의 미래를 바꾼 사람이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도 이 부분이었다.
부모가 정해준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부모를 떠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세상을 경험하고,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그 선택을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를 부모가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래곤을 길들이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길들이기’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진다.
히컵은 투슬리스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지 않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함께 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성장도 비슷한 것 같다.
세상이 정해준 모습에 나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낯선 모습을 천천히 알아가는 것.
부모가 건네준 세계를 무조건 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는 것.
실제로 원작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주제를 비교적 가볍게 풀어내면서도, 히컵과 투슬리스의 관계를 통해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하늘은 유난히 넓어 보인다.
어릴 때는 부모가 알려준 길이 안전한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그 길을 벗어나면 무섭기도 하고,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
내가 직접 선택한 방향으로.
히컵이 투슬리스와 함께 하늘을 날았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런 하늘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