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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면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까? 저 역시 한때는 성실함이 결국 사람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경력을 쌓고, 묵묵히 책임을 다하면 최소한 삶의 기반만큼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 없다를 보고 난 뒤, 그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해고를 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불안과 공포를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상영 내내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웃음이 끝날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습니다. 블랙 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절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 20년 경력도 막지 못한 구조 조정의 논리
주인공 유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펄프맨상까지 받은 인물입니다. 펄프맨상이란 제지 업계에서 수십 년간 현장을 지킨 숙련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업계 내부 포상으로, 쉽게 말해 그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상입니다. 만수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회사는 그의 정체성이었고,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계 사모펀드가 회사를 인수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숫자와 비용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루아침에 구조조정 대상자가 됩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것이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너무 익숙한 현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해고가 성과가 부족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오히려 경력이 길고 연봉이 높은 사람이 비용 절감의 명분 아래 우선순위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만수의 이야기가 특정 인물의 비극이 아니라, 수많은 중년 직장인들이 품고 있는 불안을 대변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만수가 해고 통보를 받는 장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영화는 이 구조를 "도끼질"이라는 이중적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미국 본사 경영진이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이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처음에는 냉소적인 농담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표현은 점점 무게를 얻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시스템적 폭력이 개인의 삶을 찍어내는 행위라면, 이후 만수가 선택하는 행동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끼라는 단어 하나가 시스템과 개인의 파괴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상징으로 작동하는데, 저는 이 설정이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복선과 상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만수가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년 이상 경력의 제지 전문가였으나 미국계 사모펀드의 인수 후 정리해고 통보
- 3개월 구직 활동에도 연령과 업종 특수성으로 인해 사실상 재취업 불가
- 대출 3억 원이 넘는 자가 주택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 선택으로 치달음
하지만 이 세 줄의 요약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습니다. 영화는 만수가 단순히 직장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던 언어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은 경제적 위기보다 훨씬 깊고 근원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중년 위기의 어쩔수가 없다는 합리화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은 제목 자체가 하나의 비극적 철학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카메라에 담기기 전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우의 위치, 세트, 소품 등을 총괄하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만수의 저택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과 욕망, 그리고 몰락이 집약된 공간으로 만들어냅니다. 넓은 거실과 정돈된 정원, 견고해 보이는 외관은 성공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만수는 집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집에 붙잡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단순히 "가장의 몰락"이라는 틀로만 읽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만수는 시스템의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내 미리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대안들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집을 정리하고 더 작은 곳으로 옮기는 선택, 새로운 일을 찾아보는 선택, 생활 수준을 낮추는 선택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만수는 자신이 쌓아 올린 성공의 형태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다가도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과연 나라면 달랐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정체성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너질 때 현실보다 자존심을 먼저 붙잡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블랙 코미디(black comedy)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소재를 웃음의 형식으로 다루는 장르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관객이 만수를 보며 웃다가도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극장에서 여러 번 웃음이 터졌지만, 곧이어 묘한 침묵이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만수의 어리석음이 우스운 것이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어서 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웃음은 곧 불편함으로 바뀝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종이"라는 소재의 활용입니다. 만수는 종이가 세상 모든 곳에 쓰인다고 자부합니다. 종이는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저장하며, 문명을 유지하는 매개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고 버려질 수 있는 물질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이중성을 만수의 삶과 절묘하게 겹쳐 놓습니다. 극장을 나온 뒤에도 저는 한동안 이 상징을 곱씹었습니다. 종이를 다루던 사람이 결국 종이처럼 취급당하는 아이러니가 너무도 씁쓸했기 때문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성공한 가장의 자신감을 보여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신감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집착으로 변해갑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관객이 작품 속 인물의 고통과 파국을 통해 감정적 해방감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끝내 완전한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수가 원하던 자리를 얻는 순간조차도 관객은 통쾌함보다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묘한 공허감 때문에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도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듯한 감정,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잔인한 여운이었습니다.
AI 자동화 시대, 만수는 우리의 미래인가
영화는 단순히 한 중년 남자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 거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수가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로봇이 종이 롤을 옮기는 장면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그는 평생을 들여 기술을 익혔고 현장을 이해했지만, 이제 그 자리를 기계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달한 곳에서조차 자신의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동화가 단순 반복 노동만 위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저는 그 믿음 역시 점점 흔들렸습니다. 특수지 생산 관리나 공정 감독처럼 숙련이 필요한 영역도 AI와 자동화 시스템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미래는 거대한 충격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자연스럽게 현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구조는 영화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미국 본사가 해고를 통보할 때도, 만수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도, 새로운 회사가 자동화를 추진할 때도 같은 문장이 사용됩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누군가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또 누군가는 효율성을 위해 그 말을 사용합니다. 결국 시스템의 폭력과 개인의 자기합리화가 동일한 언어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제목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소 과장된 평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산업 구조가 변하고,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며, 효율이 인간보다 우선되는 모든 사회에서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 이후 다시 한번 인간의 욕망과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극장을 나오면서 만수보다 오히려 미리를 더 오래 떠올렸습니다.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 걸음을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생존의 방식은 만수의 집착이 아니라 미리의 현실감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구조조정과 제지 산업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고 간다면 훨씬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겠지만, 설령 아무 정보 없이 보더라도 결국 자신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어쩔수가 없다가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