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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7’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던 나이였다.
단종이 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역사책에서 여러 번 봤고, 단종과 세조를 둘러싼 사건도 익숙하게 배웠다.
그런데 스크린으로 다시 마주한 열일곱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열일곱 살이면 아직 너무 어리다.
친구들과 별것 아닌 일로 웃다가도 금세 서운해지고, 좋아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마음이 들뜨기도 하는 나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도 아직 시간이 아주 많다고 믿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그 나이에 한 나라의 왕이었던 소년은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홍위가 청령포로 유배될 당시에는 16세였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약 4개월. 그리고 17세에 생을 마쳤다. 영화는 바로 그 짧은 마지막 시간을 상상한다.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책에서 몇 줄로 지나가 버린 그 4개월을 사람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영화다.
역사는 사건을 기록한다.
영화는 그 사이에 있었을 법한 표정과 대화, 밥 한 끼와 침묵을 상상한다.
그 덕분에 단종이라는 이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왕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소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령포의 강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해졌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은 궁궐도, 전투 장면도 아니었다.
청령포였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험한 지형으로 막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알려진 장소지만 단종에게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는 유배지였다.
사진으로 보면 정말 아름답다.
강물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주변 풍경만 놓고 보면 잠시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는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졌다.
영화관에서 청령포 풍경이 길게 잡혔을 때 잠깐 숨을 고르듯 화면을 바라봤다. 풍경 자체는 너무 평온한데, 저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강이 경계선처럼 보였다. 예쁜 장면인데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공간이다.
강은 물이 흐르는 길인데 이곳에서는 길이 되지 못한다.
건너편이 보이는데 갈 수 없다.
세상과 완전히 끊어진 것도 아닌데,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은 사실상 닫혀 있다.
영화는 이런 감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강과 숲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뗏목을 타고 사람들이 오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왕과 백성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선명하다.
하지만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그 경계가 조금씩 흐려진다.
여기에서 영화의 제목도 재미있게 다가온다.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에게 이홍위는 처음부터 한 사람의 친구였던 것은 아니다. 유배지의 책임자로서 감시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자신의 마을과 가족을 지켜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무게가 달라진다.
실제 역사에서 엄흥도는 단종의 사후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영화는 기록으로 남은 그 행동에서 거꾸로 질문을 던진다. 그가 그렇게까지 단종을 지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장항준 감독 역시 이 지점에서 출발해 역사에 비어 있는 두 사람의 생전 관계를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청령포를 둘러싼 강이 단순한 배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가두는 경계였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 변화가 이 영화에서 꽤 좋았다.
왕과 신하 사이에 남은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었다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면 ‘브로맨스 사극’이라는 표현이 왜 나오는지 알 것 같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브로맨스라는 말보다 마음의 빚이라는 표현이 더 먼저 떠올랐다.
엄흥도에게 이홍위는 지켜야 할 왕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앞에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사실보다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홍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왕으로만 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였을 것이다.
이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 밥상이 특히 좋았다.
흰쌀밥 한 그릇.
화려한 음식도 아니고 특별한 물건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 안에서는 같은 밥상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는 왕에게 올리는 예의가 담긴 식사다.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밥이 된다.
나중에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밥상 장면이 나올 때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큰 사건이 이어지다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화면 속 시간이 조금 느려지는 느낌이었다. ‘왕과 촌장이 같이 밥을 먹는다’는 장면 자체가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역사극에서는 왕의 옷이나 궁궐, 정치적인 사건이 인물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는 반대로 밥 한 끼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 선택이 꽤 섬세하다.
물론 이 작품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장항준 감독이 직접 밝힌 것처럼 영화는 기록에 남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기록 사이의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운 팩션에 가깝다.
영화 속 엄흥도와 이홍위의 친밀한 관계 역시 역사 기록에 상세하게 남아 있는 사실이라기보다 작품이 상상해낸 이야기다.
이 부분을 알고 보면 영화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까?’라고 따지기보다, ‘그때 정말 이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으로 보게 된다.
그 질문에 힘을 실어주는 배우가 유해진이다.
엄흥도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유해진 역시 그 인물을 크게 흔들지 않는다.
울음을 참는 얼굴.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추는 순간.
이홍위를 바라보는 짧은 눈빛.
그런 작은 표현들이 쌓인다.
박지훈이 연기한 이홍위 역시 인상적이다.
특히 감정을 크게 터뜨리지 않는 연기가 좋았다.
화가 나도 어딘가 눌려 있고, 슬픈 순간에도 눈물이 쉽게 흐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왕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또 참아야 했던 소년.
모든 것을 잃었는데 마음껏 울 수도 없는 사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단종’이라는 역사적 이름보다 ‘이홍위’라는 한 사람이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활줄 장면에 이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아픈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괴롭다.
그 장면에서 엄흥도는 충신이면서 한 사람의 벗이기도 하다.
두 역할이 한 사람 안에서 겹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관계를 거창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들려오는 말도 오래 남는다.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
짧은 한마디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상하게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강을 건넌다는 말이 장소를 이동한다는 뜻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열일곱이라는 숫자가 영화가 끝난 뒤 더 크게 남았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정치적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의 과정을 자세히 따라가기보다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 영월 유배지에 남겨진 이홍위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둔다.
그 선택 덕분에 기억에 남는 것도 거대한 사건보다 작은 장면들이다.
청령포의 강.
밥상.
호랑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마지막 활줄.
이 네 장면을 이어놓으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한 사람의 신분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왕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은 이홍위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과 외로움뿐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한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관계가 있었을까.
이 질문 때문에 박지훈의 연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박지훈 배우가 보여주는 이홍위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알고 있던 ‘비운의 왕’이라는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감독은 기존 사극에서 유약한 어린 왕으로 소비되던 단종의 이미지를 뒤집고, 강단과 의지를 가진 인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영화 속 이홍위는 계속 참고 있지만 완전히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화가 나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감정들이 쌓이면서 ‘왕’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벗겨진다.
영화가 끝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깐 화면이 어두워진 극장을 바라봤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인데도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단종이 죽어서 슬프다’는 감정보다 열일곱 살이라는 나이가 계속 생각났다. 그 나이에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한 사람의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때 영화 초반에 봤던 숫자 17이 다시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냥 나이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한 사람의 삶이 담긴 숫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연도와 사건을 먼저 기억한다.
1457년.
단종.
청령포.
엄흥도.
세조.
그렇게 외우고 나면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영화는 그 숫자 사이에 사람을 넣는다.
밥을 먹고, 강을 바라보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하고,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
그렇게 바라보고 나니 단종의 이야기가 조금 가까워졌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을 구분해서 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영화가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대화를 상상했다고 해서 그 감정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록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역사극으로서 가진 가장 좋은 점처럼 느껴졌다.
청령포의 강도 다시 생각난다.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숲은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꾼다.
수백 년 전 그곳에서 이홍위가 어떤 마음으로 강을 바라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왕이었을 때의 단종이 아니라, 왕이 아니게 된 뒤의 이홍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을까.
화가 났을까.
살고 싶었을까.
아니면 너무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을까.
<왕과 사는 남자>는 그 답을 역사적 사실처럼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마지막 4개월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단종은 더 이상 역사책 속의 한 줄짜리 인물이 아니다.
열일곱 살의 이홍위라는 한 사람이 된다.
그게 이 영화가 가장 오래 남기는 감정이다.
역사에는 수많은 왕이 등장하지만, 왕좌에서 내려온 뒤의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권력을 잃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지.
모든 이름과 지위를 내려놓았을 때 곁에 누가 남는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왕과 사는 남자>는 거대한 역사보다 작은 관계를 선택했다.
그 선택 덕분에 단종의 마지막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죽음의 장면이 아니었다.
청령포의 강이었다.
그리고 그 강을 바라보고 있었을 열일곱 살의 한 소년이었다.
역사는 그를 단종이라고 기록했다.
영화는 그 이름 뒤에 있던 사람을 잠시 우리 앞에 데려다 놓았다.
열일곱이라는 숫자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았던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왕이기 전에 너무 어린 한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