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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이었나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답답하면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쐰다. 잠깐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평소에는 너무 당연해서 이런 일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스트 하우스>를 보고 나니 달라졌다.
영화 속 가족에게 창문은 세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자신들을 갈라놓는 경계다.
밖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것도 보인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느껴진다.
그런데 나갈 수 없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아끼고, 물을 모으고, 굴뚝을 이용해 바깥의 동물을 잡고, 집 안의 흙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결국 5년이 흐른다. 실제로 영화 속 델가도 가족은 집에 갇힌 뒤 굴뚝을 통해 동물을 잡고, 집 안에서 작물을 기르며 5년을 버틴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남는 것과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부터 다른 일이 되는 걸까.
<라스트 하우스>를 보고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안전했던 집이 세상의 전부가 되는 순간
영화 초반에는 집이 꽤 든든해 보인다.
비를 피할 수 있고, 먹을 것을 보관할 수 있고, 가족이 함께 있다.
밖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돌아다니지만 적어도 집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은 집을 지키려고 한다.
문을 잠그고, 창문을 확인하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생존 도구로 바꾼다.
처음에는 이런 장면들이 조금 재미있었다.
‘나라면 집 안에 있는 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무심코 주변을 떠올려봤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수는 몇 병이나 있는지.
손전등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조배터리는 있는지.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충전기와 멀티탭까지 갑자기 생존 도구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꽂아 쓰던 물건인데, 전기가 끊기고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조건을 하나 붙이니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영화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특별한 재난 장비가 없어도 된다.
그저 평범한 집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집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된다.
가족은 가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굴뚝의 작은 틈을 이용해 바깥의 동물을 잡고, 빗물을 모으고, 집 안에 농사를 지을 공간을 만든다. 집은 점점 원래의 기능을 잃어간다. 거실은 농장이 되고, 생활용품은 도구가 되고, 집 전체가 하나의 생존 장치처럼 변한다.
그 점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적응한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다른 방법을 찾고, 물이 부족하면 물을 모으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면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만든다.
문제는 적응이 너무 잘될 때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익숙함은 위험하다.
5년이라는 시간이 그렇다.
5년이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가고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여행을 가고, 실패도 해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험도 수없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족의 아이들에게 세상은 집 안에서 멈춰버렸다.
계절은 바뀌는데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른들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집 밖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고, 자유롭게 움직이던 시절도 있다.
아이들은 다르다.
밖의 세계를 기억하기도 전에 그 세계가 닫혀버렸다.
그래서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가족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먹을 것이 있고 잠잘 곳이 있고 가족도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니니까.
5년 동안 가족이 지켜낸 것은 생명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집의 모습도 달라진다.
아이들이 자라고, 가구가 낡고, 벽에는 세월이 쌓인다.
그런데 가족은 여전히 같은 곳에 있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벽을 바라보고, 같은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본다.
처음에는 가족을 지켜주던 공간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공간 자체가 가족을 가두는 곳이 된다.
이 변화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안전과 감금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잠그면 위험한 것이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 속 가족에게 집은 그런 장소가 되어간다.
먹을 것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살아남는 일 자체가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이 부분에서 코로나19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밖에 나가는 일 하나도 예전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장을 보러 잠깐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어느 날 저녁, 답답해서 집 앞을 조금 걷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집 밖으로 나가서 10분 정도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잠깐 걷는 것도 원래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이 영화 속 가족을 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끝이 보였다.
언젠가는 문을 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식당에 갈 수도 있고, 여행을 다시 갈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영화 속 가족에게는 그 확신이 없다.
오늘도 집에 있고 내일도 집에 있다.
5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살아남았다’는 말조차 조금 다르게 들린다.
생존에는 목표가 있다.
먹을 것을 구하고, 물을 확보하고, 위험을 피하면 된다.
하지만 삶에는 목표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을 만나고 싶을 수도 있고, 사랑하고 싶을 수도 있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길을 걷고 싶을 수도 있다.
마음껏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을 수도 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일들이 사실은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답답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어른들에게 집 밖은 기억 속에 존재한다.
아이들에게 집 밖은 상상 속에 존재한다.
같은 감옥 안에서도 잃어버린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5년이라는 시간은 그 차이를 더욱 크게 만든다.
가족은 살아남기 위해 집을 지켰다.
하지만 살아남는 데 성공할수록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집을 떠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면 해결 방법은 단순하다.
문을 열면 된다.
하지만 문을 열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진짜 선택이 시작된다.
괴물을 죽이지 않은 순간, 집 밖의 세계가 다시 열렸다
후반부에 가족을 가둔 존재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처음에는 외계에서 온 침략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루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바다와 관련된 오래된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이 존재들이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지구에 살아온 생명체일 가능성을 생각한다.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이들은 외계인이 아니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의 바다에 존재했던 고대 해양 생명체다.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키고 환경을 망가뜨린 뒤 이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감독 루이 르테리에 역시 이 생명체들을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존재했던 존재로 설명하며, 영화의 상황을 인간이 오히려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온 존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의 시선이 묘하게 뒤집힌다.
처음에는 인간이 괴물에게 공격받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인간 역시 자신들이 사는 세계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셈이다.
육지를 차지하고 도시를 만들고 바다를 이용하면서 이 행성이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가 침입자일 수도 있다.
이 설정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영화가 인간을 무조건 피해자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은 아무 잘못도 없이 집 안에 갇혔다.
당장 눈앞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마지막 선택이 중요하다.
가족은 생명체를 잡는다.
죽일 수도 있다.
그동안 자신들을 가둬놓은 존재이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루스는 그 존재를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 순간 영화의 방향이 달라진다.
상대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상대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두 번째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랐다.
예전에 집에서 작은 벌레 하나가 계속 보여서 한동안 잡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냥 없애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서 계속 나타나는 걸 보면서 문득 ‘내가 저 벌레에게는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존재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 속 해양 생명체와 집 안의 벌레를 같은 문제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때 이후로 내가 불편하다고 해서 상대의 존재 이유까지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됐다.
<라스트 하우스>의 마지막 선택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무서운 존재를 없애면 문제가 끝나는가.
아니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도 생존의 한 방식인가.
결국 가족은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택 이후 집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착한 선택의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영화는 인간과 생명체가 완전히 화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족이 떠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비로 잠겨버린 도시.
익숙했던 거리의 흔적.
예전과 전혀 다른 지구.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집이 아니라 불확실한 바깥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장면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제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 있고, 누구를 만날지 생각할 수 있고,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족이 배를 타고 집을 떠난 뒤 다른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읽힌다. 루스가 무전으로 다른 생존자를 찾자 마지막에 누군가 “Hello?”라고 응답하지만, 그 목소리의 정체는 영화에서 확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단지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가족에게는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집에 돌아와 평소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물을 마신 다음 창문을 열었다.
그때 세 번째로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밖에서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맞은편 건물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창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영화 속 가족에게는 그 평범한 소리가 너무 먼 세상의 소리였을 것이다.
누군가 밖에서 걷고 있다는 것.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
원하면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것.
그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이 꽤 큰 자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라스트 하우스>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였다.
먹고 자고 버티는 일만 남은 하루.
오늘과 내일이 똑같고, 1년 뒤에도 같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의 창문은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나갈 수 없는 벽이었다.
마지막에는 그 경계가 사라진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전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도시는 물에 잠겼고, 익숙했던 생활도 사라졌다.
가족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전의 편안한 집이 아니라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바깥세상이다.
그런데도 마지막이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이제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 있다.
누구를 만날지도 정할 수 있다.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안전한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불확실한 바깥으로 나가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라스트 하우스>는 생존에 관한 영화처럼 시작하지만 끝에 가면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삶을 살아남길 원하는가.
가족에게 집은 처음에는 삶을 지켜주는 마지막 장소였다.
5년이 지나자 그 집은 삶을 멈춰 세우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집을 떠남으로써 다시 삶을 선택한다.
생존과 삶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음식과 물과 안전이 필요하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창문을 열 수 있다는 것.
원하면 집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라스트 하우스>를 보고 나서 그 평범한 일이 꽤 소중해졌다.
살아남는 것과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부터 다른 일이 되는 걸까.
아마 그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