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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0만 뷰. 16살 소년이 방구석에서 만든 9분짜리 유튜브 영상이 기록한 숫자입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잠깐 화제가 되고 사라질 콘텐츠라고 생각했던 영상이 결국 A24의 장편 영화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호기심이 꽤 컸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이 공간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 저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을 본 것도 아니고,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와 소리를 지르게 만든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한동안 굳어 있었습니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영화 속 그 끝없는 공간을 잠시나마 직접 걸어 나온 사람처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흐려진 기분이었습니다.
평소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라 웬만한 점프 스케어나 잔인한 장면에는 크게 놀라지 않는 편인데, <백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를 압박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 감각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영화 백룸: 인터넷 도시괴담이 극장까지 온 배경
2019년, 미국 인터넷 커뮤니티 포챈(4chan)에 사진 한 장과 함께 짧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현실의 벽을 잘못 통과하면 백룸에 떨어진다."
단 한 줄의 설정이었지만 오래된 카펫 냄새, 윙윙거리는 형광등 소리, 끝없이 이어지는 노란 방이라는 묘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특별한 설명도, 복잡한 세계관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 빈틈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백룸을 상상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만족할 만한 작품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케인 파슨스는 "내가 보고 싶은 백룸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습니다.
무료 오픈소스 3D 프로그램인 블렌더(Blender)를 이용해 공간을 직접 구현하고, VHS 특유의 거친 화면과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기법을 더했습니다. 실제 누군가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연출한 이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현실감을 끌어올렸습니다. 단순한 CG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우연히 촬영한 영상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9분짜리 영상은 공개 직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조회수는 순식간에 수천만 회를 넘어섰고, 웹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A24의 장편 영화까지 제작됩니다. 불과 스무 살에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케인 파슨스는 단순히 천재 신인이라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크리에이터 IP가 영화로 확장되는 일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괴담 하나가 이 정도 규모의 영화 프로젝트로 성장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시대가 달라졌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 문화가 영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가 인터넷 문화를 따라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공간 연출이 공포의 핵심이 되는 방식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공포의 방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존재나 큰 효과음으로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하지만 <백룸>은 정반대입니다.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조용합니다. 텅 빈 공간이 계속 이어지고, 인물은 그 안을 걷기만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평범한 풍경이 점점 숨 막히는 공포로 변해 갑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계속 불안합니다. 오히려 무엇이 나타날지 몰라서 더 긴장하게 됩니다.
영화의 핵심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라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공간인데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낍니다. 늦은 밤 학교 복도, 영업이 끝난 쇼핑몰, 새벽의 지하철 역사처럼 익숙하지만 비어 있는 공간이 주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 말입니다.
<백룸>은 그 감각을 영화 전체로 확장합니다.
이번 영화를 위해 제작진은 사운드 스테이지 네 개를 연결해 약 2,740㎡ 규모의 실제 세트를 만들었습니다. 촬영 스태프조차 도면 없이는 길을 잃었다고 할 정도였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금세 이해하게 됩니다. 화면 너머에서도 공간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단순히 CG로 만든 공간이었다면 절대 전달되지 않았을 무게감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특히 광각 렌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촬영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복도는 실제보다 훨씬 길어 보이고, 천장은 끝없이 높아 보입니다. 인물은 점점 작아지고 공간은 끝없이 커집니다. 보는 사람 역시 그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형광등이 끊임없이 울리는 소리와 빈티지 신시사이저 음악이 더해지면서 심리적인 압박감은 극대화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오래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포는 눈보다 귀를 통해 먼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영화가 관객을 억지로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깜짝!' 하고 끝나는 공포가 아니라 천천히 숨통을 조여 오는 공포를 택했고, 그 선택이 이 영화만의 정체성을 완성했다고 생각합니다.
백룸이 다른 공간 공포 영화들과 구별되는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점프 스케어 없이 공간 자체로 긴장감을 구축
- 실제 세트를 활용한 압도적인 현실감
- 광각 렌즈가 만들어내는 비정상적인 원근감
- VHS 화질과 파운드 푸티지 기법이 주는 생생한 몰입감
- 빈티지 신시사이저 음악과 형광등 소음이 만드는 심리적 압박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공포는 반드시 괴물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간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서사의 한계와 이 영화를 보는 올바른 기대치
물론 아쉬운 부분도 분명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래서 백룸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가 아니라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지 않은데?"였습니다. 미스터리를 남기는 방식 자체는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설명을 아낀다기보다 아직 준비가 덜 된 느낌이 조금 더 강했습니다.클라크와 메리의 감정선 역시 조금 더 깊게 쌓였더라면 공간의 공포가 훨씬 강하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공간으로 넘어가 버리다 보니 감정적으로 따라가는 데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영화와 설명이 부족한 영화는 분명 다릅니다. 저는 이번 작품이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다고 느꼈습니다. 공간은 완성형에 가까웠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아직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조차도 감독의 나이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장편 데뷔작을 만든 감독이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공간을 설계하는 감각만큼은 이미 베테랑 감독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백룸>이 인터넷 밈(Meme)에서 출발한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세대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과 고립감을 공간이라는 형태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기존 공포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인터넷 문화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영화 문법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모든 공포영화가 친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관객이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감정선은 필요합니다. <백룸>은 그 부분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동시에 앞으로 어떤 시리즈가 펼쳐질지 가장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완성형 공포영화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공포 문법의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볼 계획이라면 극장에 가기 전에 케인 파슨스의 원작 유튜브 영상을 먼저 보고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세계관을 알고 들어가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가는 경험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완벽한 공포를 기대하기보다, 공포라는 장르가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체험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본다면 분명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영화를 다 본 뒤에도 한동안 노란 형광등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백룸>은 이미 자신만의 공포를 완성한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