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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을 적은 종이 한 장에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목이 워낙 유명했고, 주변에서도 "인생 영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뻔한 감동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이 남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만 들었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과 눈물 몇 방울을 유도하는 휴먼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정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에 가까웠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어디에 있을까, 한 번 따져보겠습니다.
영화 버킷리스트: 정반대의 두 사람이 한 병실에서 만난 이유
영화는 두 명의 시한부 환자, 즉 의학적으로 생존 가능 기간이 제한된 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여기서 시한부란 치료 가능성이 없거나 극히 낮아 의사가 예측 여명을 통보한 상태를 말합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에 따르면 말기 암 진단 이후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병원을 소유한 백만장자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루왁 커피를 즐깁니다. 루왁 커피란 사향고양이가 커피 원두를 먹고 배설한 뒤 수거한 원두로 만든 커피로, 희소성 때문에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웃음이 먼저 나왔습니다.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 최고급 커피를 자랑스럽게 마시고 있는데, 정작 그 원두의 유래를 듣고 당황하는 모습이 묘하게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카터가 그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병실 친구를 넘어 진짜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반면 카터는 평생 정비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해온 사람입니다. 인스턴트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평범한 가장이죠. 저는 카터라는 인물을 보면서 어쩐지 우리 주변의 아버지 세대가 떠올랐습니다. 가족을 위해 평생 일했지만 정작 자신의 꿈이나 욕심은 뒤로 미뤄둔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카터의 대사 하나하나가 유독 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두 사람의 계층 차이는 커피 한 잔만으로도 설명됩니다. 한 사람은 세계 최고가 커피를 마시고, 다른 한 사람은 늘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를 마십니다.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경제적 수준도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시한부라는 같은 운명 앞에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대비 구조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그려져서 인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버킷리스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현실 앞에서 돈도,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결국 큰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버킷리스트가 진짜 말하는 핵심 내용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스카이다이빙, 피라미드, 히말라야 같은 체험을 하는 모험담'으로 기억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기억했습니다. 화려한 여행 장면과 세계 각국의 풍경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이상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들은 여행 장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오랫동안 딸 에밀리와 연락을 끊고 살아왔습니다. 카터가 몰래 에밀리의 집 앞으로 차를 세운 장면, 그리고 에드워드가 분노하며 버킷리스트를 찢어버리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정서적 정점(Emotional Climax)이란 서사 구조에서 캐릭터의 내면 갈등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순간을 말하는데, 이 영화의 진짜 정점은 스카이다이빙이 아니라 바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관계들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연락하는 일이 더 어려워집니다. 영화 속 에드워드 역시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관계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킷리스트의 진짜 항목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겉으로 드러난 항목: 스카이다이빙, 이집트 피라미드 등반, 히말라야 등정, 상어 수영
- 영화가 진짜 완성하려 한 항목: 에드워드와 딸 에밀리의 화해, 카터와 아내 버지니아의 감정 회복,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것
특히 카터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입니다. 그는 아내를 평생 사랑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표현이 줄어든 것입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바에서 젊은 여성이 다가왔을 때 카터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 동안 쌓인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사랑은 거창한 이벤트보다 결국 선택의 반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이 구조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테러관리이론(TMT, Terror Management Theory)과도 연결됩니다. TMT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때 그것이 행동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죽음을 직면했을 때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영화를 본 뒤 제 삶의 태도가 달라진 것
영화를 본 직후 저도 노트를 꺼냈습니다. 영화 한 편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펜을 들고 적어보려니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저는 당연히 세계 여행이나 특별한 경험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적힌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기. 부모님과 여행 한 번 가기. 고맙다는 말을 미루지 않기.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기.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은 거창한 모험이 아니라 미뤄둔 감정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현실의 시한부 환자 대부분은 에드워드처럼 전용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지나치게 낭만화했다는 지적도 존재합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감독 롭 라이너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경제적 자유가 아니라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어디를 갔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만났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후회하는가에 가깝습니다.
제 경험상 《버킷리스트》는 시간이 지나 다시 볼수록 더 좋은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여행이 보이고, 두 번째에는 우정이 보이고, 세 번째에는 후회와 용서가 보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카터의 대사는 더 현실적으로 들리고, 에드워드의 침묵은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여기에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라는 두 배우의 연기 앙상블(Ensemble)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두 배우는 마치 실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서로 다른 에너지가 충돌하면서도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왜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보는 것, 정말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입니다. 거창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하지 못했던 전화 한 통, 미뤄둔 약속 하나,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이 영화가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 있는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우리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