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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번 영화는 개봉 전부터 기대치를 꽤 낮춘 상태로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공개된 예고편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해외 시사회 이후 이어진 엇갈린 반응과 로튼토마토 57%라는 평점을 접하면서 '적당히 즐기고 나오면 다행이겠다' 정도의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실망보다 가능성이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머릿속에 맴돈 한마디는 "이 캐릭터, 나중에는 정말 크게 터질 것 같다."였습니다. 문제는 그 '나중'이 이번 영화 안에서는 끝내 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분명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새로운 DCU의 핵심 캐릭터를 소개하고, 앞으로 펼쳐질 세계관을 준비하며, 슈퍼맨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히어로를 탄생시키려는 의도도 충분히 읽힙니다. 하지만 그 모든 준비 과정이 끝났을 때 정작 관객에게 남아야 할 결정적인 한 방은 끝내 비어 있었습니다. 마치 활시위를 끝까지 당겨 놓고도 화살을 놓지 않은 듯한 답답함이 두 시간 내내 이어졌고, 극장을 나설 때는 "분명 나쁜 영화는 아닌데 왜 이렇게 밋밋하지?"라는 묘한 허탈감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로튼토마토의 낮은 평점 역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영화를 직접 본 뒤에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결과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 슈퍼걸: 캐릭터는 건졌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만족했던 부분은 단연 카라 조엘이라는 캐릭터 자체였습니다. DCU, 즉 DC 유니버스(DC Universe)는 마블의 MCU처럼 여러 작품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체제를 의미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첫 솔로 영화가 단순히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년간 세계관을 이끌어 갈 주인공을 관객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떠안게 됩니다. 실제로 MCU 역시 2008년 아이언맨의 성공이 없었다면 지금의 거대한 프랜차이즈는 존재하기 어려웠고, 당시 다른 초기 작품들은 완성도 면에서 호불호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슈퍼걸은 적어도 캐릭터를 소개하는 데만큼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카라 조엘은 멸망한 크립톤에서 가족의 죽음을 모두 지켜본 생존자입니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 힘 때문에 술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결국 붉은 태양 아래까지 찾아가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약하게 만든 뒤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이런 설정은 기존 히어로 영화에서 흔히 보던 정의감 넘치는 완벽한 영웅과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강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처를 안고 있어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라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설정이 좋은 이유는 카라가 처음부터 존경받는 영웅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냉소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며,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 거친 태도 사이사이로 문득 드러나는 연민과 따뜻함이 오히려 캐릭터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루시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이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때 잠시 흔들리는 표정에서는 말보다 훨씬 많은 감정이 전달됐습니다.

     

    이 모든 감정선을 완성한 것은 역시 밀리 올콕의 연기였습니다. 냉소와 분노를 표현할 때는 거칠지만 결코 과장되지 않았고, 상처 입은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눈빛 하나만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립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를 정말 잘 캐스팅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습니다. 실제로 해외 평론들 역시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내리면서도 밀리 올콕의 존재감만큼은 거의 공통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를 보고 나서 캐릭터 측면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느낀 부분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카라 조엘의 트라우마와 자기 파괴적 성향이 기존 히어로들과 차별화된다.
    • 밀리 올콕이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 슈퍼맨의 사촌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독립적인 캐릭터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액션이 남긴 공백

     

    반대로 가장 큰 아쉬움은 액션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감정과 서사가 완결되는 장면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시간이 지나도 관객들이 "그 장면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슈퍼걸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런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는 슈퍼맨급의 육중한 타격감과 압도적인 비행 액션을 기대했습니다. 특히 발차기 한 번으로 공간을 가르는 장면은 극장에서 보면 엄청난 쾌감을 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본편에서는 그런 순간들이 이어지지 못합니다. 액션의 규모는 분명 크지만 감정의 고조와 리듬이 충분히 따라오지 못하면서 막상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보는 동안에는 화려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희미해지는 액션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전작 슈퍼맨이 떠올랐습니다. 미스터 테리픽의 액션이나 레이저를 활용한 전투 장면은 단순히 화려해서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과 능력, 세계관의 규칙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반면 슈퍼걸은 강력한 능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캐릭터의 개성과 연결해 폭발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액션이 이야기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슈퍼걸·로보·루시라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한 화면에 모였음에도 끝내 "이 영화 하면 바로 이 장면"이라고 떠올릴 만한 대표 시퀀스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여러 해외 리뷰에서도 액션 편집과 임팩트 부족을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DCU 각색과 빌런, 그리고 결말이 남긴 의문

     

    원작인 《Supergirl: Woman of Tomorrow》는 루시의 복수와 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래픽 노블입니다. 그래픽 노블은 단순한 연재 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장편 서사를 담은 작품을 의미하는데, 원작에서 슈퍼걸은 이야기의 중심이라기보다 루시의 여정을 함께하는 안내자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이 구조를 과감하게 뒤집어 카라를 명실상부한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솔로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지녔던 감정의 무게가 다소 옅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크립토를 둘러싼 설정 변화는 호불호가 갈릴 만했습니다. 원작에서는 비교적 담담하게 넘어가는 요소가 영화에서는 제한 시간 안에 해독제를 구해야 하는 긴박한 이야기로 바뀌면서, 카라의 행동 동기가 루시를 지키는 일보다 크립토를 구하는 일에 더 집중되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반려동물을 향한 애정 역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그 결과 루시가 이야기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빌런 크렘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초반에는 잔혹한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마지막까지도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강력한 적이라는 인상은 남기지 못합니다. 히어로 영화에서 훌륭한 빌런은 영웅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축인데, 크렘은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다소 평면적이었습니다. 실제 해외 평론에서도 빌런의 입체감 부족은 반복해서 언급되는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의아했던 것은 결말의 선택입니다. 영화는 직전까지 루시에게 복수는 또 다른 상처를 낳을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 카라는 스스로 그 복수를 실행합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감정적으로 통쾌하기보다 '방금 전 메시지와 충돌하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더구나 로보라는 캐릭터가 이미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마지막 처리를 로보에게 맡겼다면 캐릭터 소개와 서사적 설득력을 동시에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작은 선택 하나였지만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좌우할 만큼 아쉬운 지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 때문에 음악과 사운드에서도 좀 더 개성 있는 스타일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크게 튀지 않았습니다. 화려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무난한 수준에 머물렀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인상 역시 결국 '평범함'이라는 단어로 정리됩니다.

     

    결국 슈퍼걸은 뛰어난 주인공을 얻는 데는 분명 성공했습니다. 다만 그 매력적인 주인공을 끝까지 폭발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극장을 나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카라 조엘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훗날 DCU가 더 확장됐을 때 다시 돌아보면 지금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퍼스트 어벤저가 훗날 MCU 전체를 통해 재평가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완성형 작품이라기보다,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캐릭터를 위한 긴 프롤로그에 가까웠습니다. 아쉬움은 분명 컸지만, 그럼에도 다음에 등장할 카라 조엘만큼은 여전히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hyEeUq1s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