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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리뷰 (상실, 정체성, 감정)

flowerpiggy 2026. 8. 3. 22:13

목차


     

    노 웨이 홈 이후 저는 솔직히 MCU를 향한 설렘이 많이 옅어진 상태였습니다. 거대한 멀티버스와 끝없이 확장되는 세계관은 분명 볼거리는 화려했지만, 정작 영화관을 나설 때 마음속에 오래 남는 감정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역시 큰 기대 없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도 화려한 액션과 쿠키 영상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진 뒤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영화관을 나와 한참 동안 로비를 서성였고, 머릿속에는 마지막 장면과 피터의 표정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재난을 막아내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니라,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한 청년이 자신의 삶을 다시 붙잡아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 오히려 지금의 MCU에서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세상 속, 홀로 남겨진 피터의 상실

     

    저 역시 처음에는 "스파이더맨 영화라면 웹스윙 액션과 화려한 전투가 중심이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관객을 이끌어 갑니다. 피터 파커는 여전히 뉴욕을 지키고 있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손목 통증과 두통을 견디며 낮에는 자원봉사를 하고, 밤이 되면 멀리서 MJ의 SNS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녀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다가갈 수 없고, 자신을 소개할 수도 없는 현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쓸쓸했습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지만 정작 자신의 일상은 아무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설정이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감정은 단순히 외로움이 아닙니다.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라는 극단적인 고립감입니다. 누군가와 다투거나 멀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 자체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노 웨이 홈에서 피터가 스스로 선택했던 희생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이번 작품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장면 하나하나로 체감하게 만듭니다. 특히 경찰서 유리창 너머에서 드울프 형사와 손짓으로만 소통하는 장면은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피터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사람과 세상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감정이 충분히 쌓여 있기 때문에 MJ와 네드를 다시 마주하는 장면은 단순한 팬서비스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장면에서 액션보다 훨씬 큰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피터와 함께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평범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잃어버렸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연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정을 서두르지 않고 오랫동안 결핍의 시간을 보여준 덕분에 평범한 식탁과 대화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처럼 다가왔습니다.

     

    영화는 사랑이란 결국 기억보다 더 깊은 감정이라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넵니다. MJ는 피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고, 관객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홈커밍부터 이어진 세 편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웃고, 싸우고, 성장했던 기억이 우리에게도 축적되어 있었기에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보는 짧은 시선만으로도 수많은 감정이 전달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기억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오래된 인연이 가진 힘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피터 파커인가, 스파이더맨인가 — 정체성의 충돌

     

    이번 영화가 기존 MCU와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맥거핀(MacGuffin)을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필사적으로 쫓지만 실제 핵심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초반에는 브이맥스라는 존재가 모든 사건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영화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물건이나 힘이 아니라 피터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거대한 사건으로 시선을 끌어당긴 뒤 결국 감정으로 귀결되는 구조가 상당히 영리했습니다.

     

    진 그레이 역시 단순히 새로운 인기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텔레파시(Telepathy) 능력자인 그녀는 피터의 상처를 직접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넌 피터 파커야, 아니면 스파이더맨이야?"라는 한 문장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히어로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피터가 "둘 다"라고 답하는 순간 저는 노 웨이 홈의 마지막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면서까지 모두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남겨진 것은 스파이더맨뿐이었고, 피터 파커라는 청년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브랜드 뉴 데이는 바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영화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보다 한 사람의 삶을 회복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톰 홀랜드의 연기가 이번 영화를 끝까지 끌고 갑니다. 저는 오래된 시리즈일수록 배우의 얼굴에 시간이 쌓인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번 작품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메이 숙모를 떠올리는 플래시백에서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만으로도 죄책감과 그리움이 동시에 전해졌고, MJ를 마주하는 순간에는 반가움과 두려움, 미련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화려한 CG보다 배우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이 있었기에 피터의 감정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영화가 피터의 정체성 갈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거미 DNA 폭주라는 물리적 위기를 내면 붕괴의 시각적 표현으로 활용
    • 진 그레이를 빌런이 아닌 철학적 거울로 배치
    • 브루스 배너를 '구원받지 못한 피터의 미래'처럼 등장시켜 서사적 경고를 삽입
    • 감정 장면을 액션 시퀀스 사이사이에 배치해 이야기의 밀도를 끝까지 유지

    작은 이야기로 가장 큰 감정을 만들어내는 감정 클라이맥스

     

    최근 MCU가 멀티버스 중심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감정의 밀도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입니다. 세계가 멸망할 위기가 반복될수록 오히려 긴장감은 줄어들고, 캐릭터 개인의 삶은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브랜드 뉴 데이가 우주를 구하는 대신 피터 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감정은 훨씬 커졌고, 오히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 속 옐레나가 말하는 "뉴 어벤저스는 큰 감자를 맡고, 너는 작은 감자를 맡는 거야."라는 대사는 웃음을 주면서도 영화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세상을 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내는 일 역시 영웅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라는 초창기 설정이 다시 떠올랐고, 거대한 세계관보다 골목길 하나를 지키는 영웅이 왜 사랑받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후반부에는 퍼니셔와 헐크, 진 그레이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조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터와 MJ의 감정선이 충분히 무르익고 있었던 만큼, 마지막 30분 정도만이라도 두 사람에게 조금 더 시간을 할애했다면 엔딩의 여운은 훨씬 길어졌을 것 같습니다. 진 그레이의 목적 역시 예상보다 단순하게 마무리된 점은 조금 아쉽게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은 내러티브 구조 자체가 기존 MCU와 확실히 다릅니다. 외부의 적을 쓰러뜨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너진 내면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며, 최종 결전보다 마지막 감정이 더 중요한 영화였습니다. 저는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화려했던 액션보다 피터가 조용히 웃던 장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습니다.

     

    MCU가 다시 기대되는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액션보다 감정을, 스케일보다 사람을 선택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마블 영화에 다소 지쳤던 분이라면 오히려 이번 작품이 새로운 출발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톰 홀랜드가 9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피터 파커라는 인물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는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값졌습니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이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것 같아 영화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xj28u1n3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