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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딧세이>는 호메로스의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만든 2026년 영화다. 맷 데이먼이 오디세우스, 앤 해서웨이가 페넬로페, 톰 홀랜드가 텔레마코스, 로버트 패틴슨이 안티노우스를 연기했다. 젠데이아는 아테나 역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약 172분 동안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간다. 동시에 그가 없는 동안 이타카에서 흘러간 시간도 함께 보여준다.
놀란은 이야기를 단순한 시간 순서로 이어 붙이지 않는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끼어들고, 이미 지나간 장면이 뒤늦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억을 하나씩 되찾는 듯한 방식이다.
화면의 규모 역시 놀란 답다.
<오딧세이>는 전편을 IMAX 70mm 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장편영화로 소개되고 있다. 거대한 바다와 전투 장면, 광활한 풍경을 화면 가득 담아내는 방식은 작은 화면보다 극장에서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거대한 파도도, 괴물도, 전쟁 장면도 아니었다.
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집에 도착한 뒤의 오디세우스였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분명한 목적지다.
그곳에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고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다. 왕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편으로 돌아가야 하고, 아버지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그가 떠난 지 20년이나 흘렀다는 사실이다.
10년은 트로이 전쟁에서 보냈고, 이후 10년은 바다를 떠돌았다. 그동안 오디세우스가 겪은 일은 그의 몸뿐 아니라 기억과 마음까지 바꿔놓았다.
이타카에 남은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렸고,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운 나이에서 한 사람의 성인이 되었다.
그러니 오디세우스가 돌아간다고 해서 20년 전의 가족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돌아갈 장소는 있어도 돌아갈 시간은 없다.
이 문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우리는 흔히 귀향을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로 생각한다. 길고 고된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게 진짜 어려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달라진 사람들 앞에서, 달라져버린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바다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시선이 간다. 괴물과 전투, 유혹과 죽음. 놀란은 이 유명한 모험들을 거대한 스케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모험보다 그 사이에 있는 시간이다.
오디세우스는 무엇을 겪었는지 조금씩 드러낸다. 어떤 기억은 늦게 등장하고, 앞에서 봤던 장면의 의미가 뒤에서 달라진다. 마치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을 본인 스스로도 천천히 들춰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 기억이 항상 연대기처럼 정리되어 있을 리 없다.
특히 오디세우스는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결정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고, 트로이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승리의 영광과 함께 자신이 내린 선택의 흔적도 가지고 돌아온다.
그래서 그의 귀향은 편안한 휴식처럼 보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바다와 괴물이 적이었다면, 집에 가까워질수록 상대해야 할 것은 기억과 책임이 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쟁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과연 전쟁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붙잡게 된 질문이다.
여기서 페넬로페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20년을 보냈다면 페넬로페 역시 그 20년을 살아냈다. 그녀에게도 시간이 있었다. 기다림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궁전에는 남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이 들어와 있고, 그녀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아들의 안전까지 지켜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이타카를 지키는 것도 하나의 전쟁이었다.
텔레마코스는 더 복잡하다.
그에게 아버지는 가족이면서 동시에 전설이다.
어릴 때 떠난 사람이니 기억보다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아버지가 실제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반가움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같은 인물일까.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 사이에 놓인 20년은 그 질문을 만든다.
세 사람은 모두 이타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
오디세우스에게 귀향은 돌아가는 일이었다.
페넬로페에게는 기다림이 끝나는 일이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일이었다.
같은 집을 향한 세 개의 귀향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마주 앉았던 날이 있었다. 예전에는 만나자마자 할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는데, 막상 다시 만나니 첫 몇 분이 이상하게 어색했다.
서로의 삶을 모르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있었다.
그 사람이 변한 것도 있겠지만 나도 변했다. 예전의 기억은 그대로인데 지금의 관계는 그 기억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딧세이>를 보면서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특별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사를 하면서 예전에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예전과 조금 달랐다. 나 역시 예전과 같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사람 사이에도 시간이 쌓인다는 것을.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에게는 이타카가 그대로 남아 있었을지 몰라도 그 안의 사람들은 변해 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한 장면이 끝난 뒤에도 쉽게 다음 장면으로 마음이 넘어가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화면에서는 거대한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돌아가면 정말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더 오래 남았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과 집에서 다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이전의 삶이 자동으로 복구되지는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존을 증명하는 일만이 아니다.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달라진 가족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게 오히려 더 어려운 귀향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오디세우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오디세우스를 전쟁의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분명 많은 것을 잃었다. 부하들을 잃었고, 긴 시간을 빼앗겼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수없이 죽을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그가 모든 비극의 수동적인 희생자는 아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는 수많은 결정을 내렸다.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를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죽음과 파괴의 흔적 역시 따라온다.
그래서 귀향은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질렀던 일과도 마주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전쟁 영웅의 당당함보다 오래 버틴 사람의 피로가 얼굴에 남아 있다. 전쟁의 상처와 심리적 후유증을 짊어진 인물로 바라보면 그의 귀향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동시에 놀란은 원작의 신화적 세계를 상당 부분 인간의 이야기 쪽으로 끌어온다.
신들의 개입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인간의 선택과 기억, 전쟁의 후유증이 더 앞에 나온다. 이 변화는 영화의 장점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아쉬움도 남긴다. 『오디세이아』 특유의 신과 인간이 뒤엉킨 낯선 세계를 기대했다면 조금 허전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선택이 영화의 주제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영웅보다 자신의 선택을 기억하고 그 결과를 짊어진 인간으로 오디세우스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귀향은 운명에 의해 주어진 결말이 아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끌어안은 채 다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오딧세이>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역시 바다다.
거대한 화면에 파도가 밀려오고 배가 흔들릴 때면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잠시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놀란이 왜 IMAX 70mm 촬영을 고집했는지도 이런 순간에는 이해가 된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통과해야 하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고 나니 바다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더 오래 남았다.
전쟁을 지나온 오디세우스.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페넬로페.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
세 사람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들어 있다.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이었다.
집은 사람을 기다려주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돌아간다고 해서 과거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20년 전의 남편이 될 수 없고, 텔레마코스 역시 더 이상 어린 아들이 아니다. 페넬로페도 남편이 떠나기 전의 여자가 아니다.
그러니 귀향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달라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다.
이 생각을 하고 나니 영화의 마지막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모험의 끝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그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한다.
우리도 비슷한 순간을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한다.
오랫동안 떠났던 장소로 돌아갔을 때.
예전에 살던 동네를 다시 걸었을 때.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
분명 익숙한 곳인데 어딘가 낯설다.
그 이유는 장소만 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온 내가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딧세이>가 내게 남긴 것은 영웅의 화려한 귀환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건너온 한 사람이 마침내 집 앞에 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면 과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
대신 지금의 자신으로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
어쩌면 귀향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다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다.
바다는 건넜다.
수많은 괴물과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훨씬 작고 조용한 싸움이다.
달라진 가족과 다시 사랑하는 것.
지나간 자신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상처를 가진 채 오늘을 살아가는 것.
<오딧세이>는 결국 한 영웅이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집에 돌아온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처럼 남았다.
사람은 떠났다가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떠나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진짜 귀향은 과거의 나를 되찾는 일이 아니라, 달라져버린 나를 데리고도 다시 살아갈 곳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