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영화 <오펜하이머> - 내가 만든 것이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mynote45009 2026. 9. 3. 21:34

목차


     

    3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왔다.

     

    이상하게도 가장 강렬했던 건 폭발 장면이 아니었다.

     

    엄청난 소리와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던 순간보다, 그 뒤에 남은 한 사람의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말도 거의 없고 움직임도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던 얼굴.

     

    집에 돌아와서도 그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폭탄의 위력보다 한 가지 질문이 더 무겁게 남는다.

     

    인류를 발전시킨 지식이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다면, 그 지식을 만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괴물 같은 무기를 만들어낸 사람일까.

     

    아니면 시대가 요구한 일을 수행한 과학자였을까.

     

    둘 중 하나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그 둘 사이에서 계속 관객을 붙잡아둔다.

     

    그게 이 영화가 불편하면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였다.

     

    수많은 사람의 지식이 하나의 무기가 되기까지

     

    영화 초반은 꽤 정신없다.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시간도 계속 움직인다. 젊은 오펜하이머가 유럽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따라가다가 미국으로 넘어가고, 다시 스트로스의 청문회가 등장한다. 익숙한 이름 하나를 알아들으면 또 다른 과학자의 이름이 따라온다.

     

    극장에서 볼 때는 이름을 놓칠까 봐 괜히 긴장했다.

     

    ‘이 사람은 누구였지?’

     

    잠깐 생각하는 사이 대화는 이미 몇 걸음이나 앞서가 있다.

     

    옆자리 관객들은 조용히 화면을 따라가고 있는데 혼자 머릿속으로 인물 관계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한 번 놓치면 다시 설명해주지 않을 것 같은 속도라서, 대사의 의미보다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썼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그 복잡함이 조금 이해됐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는 혼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리학을 공부하고, 다른 과학자들과 만나고, 여러 연구자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모인다. 그렇게 각각 떨어져 있던 지식과 사람들이 연결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작업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책임자로 발탁됐고, 로스앨러모스에 여러 분야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모아 복잡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미국 에너지부 역시 이 과정에서 과학자뿐 아니라 군과 정부 조직이 함께 움직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핵분열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이 영화의 이야기 방식과도 묘하게 겹쳐 보였다.

     

    하나의 원자핵이 쪼개지고, 그 과정에서 나온 에너지가 또 다른 반응을 일으킨다.

     

    오펜하이머의 삶도 비슷하다.

     

    한 번의 선택이 다음 선택을 부르고, 한 사람과의 만남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든다. 작은 사건 하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까지 번져간다.

     

    영화의 편집 방식도 이런 느낌을 강화한다.

     

    현재와 과거가 빠르게 교차하고, 한 인물의 기억이 다른 사건의 의미를 바꾼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도 새로운 정보가 붙는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보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식도 그렇다.

     

    누군가 발견한 지식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연구가 되고 기술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 발견한 사람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오펜하이머가 연구실에서 바라보고 있던 것은 물리학이었다.

     

    하지만 그 지식이 국가의 손에 들어가자 성격이 달라졌다.

     

    과학자의 호기심은 군사 전략이 되고, 연구 결과는 국가의 힘이 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과학자들만의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미국 정부와 군이 거대한 자원과 조직을 동원했고, 과학적 연구는 전쟁이라는 목적 아래 움직였다.

     

    이 지점에서 책임이라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오펜하이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프로젝트를 이끈 핵심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폭탄을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사용할지를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다.

     

    지식을 만든 사람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책임도 하나의 이름에만 묶어둘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을 쉽게 정리하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폭발은 몇 초였지만, 책임은 그날 끝나지 않았다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긴장감이 쌓이고, 드디어 폭발이 시작된다.

     

    거대한 불덩이가 피어오른다.

     

    소리가 뒤늦게 밀려온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트리니티 실험은 세계 최초의 핵무기 폭발이었다. 미국 에너지부 자료에 따르면 플루토늄 내폭형 장치가 오전 5시 30분 폭발했고, 당시 폭발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규모의 힘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남은 건 화려한 폭발이 아니었다.

     

    폭발 직후 오펜하이머의 얼굴이었다.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숨을 크게 쉬기가 어려웠다. 폭발이 끝났는데도 장면이 끝난 것 같지 않았다. 화면 속 오펜하이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동안 나도 한동안 자세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지나갔을까.

     

    ‘우리가 해냈다’는 환희였을까.

     

    ‘이제 정말 시작됐구나’라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마 하나만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평생 공부했던 물리학이 눈앞에서 실제 힘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과학자로서 벅찬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복잡한 감정이 킬리언 머피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로저 이버트의 평론에서도 <오펜하이머>가 폭발 자체보다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내면의 혼란과 책임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표정과 시선을 반복적으로 포착하는 촬영 방식이 영화의 핵심적인 표현 수단으로 평가된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적인 성공이고, 누군가에게는 전쟁을 끝낼 무기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얼마 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다.

     

    이 장면은 짧지만 이상할 만큼 차갑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피가 묻은 것 같다고 말한다.

     

    트루먼은 폭탄 사용을 결정한 주체가 자신이라는 태도를 보인다.

     

    그 순간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굳는다.

     

    여기에서 ‘책임’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른다.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

     

    반대로 자신이 만든 기술이 엄청난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을 알게 됐다면, 그 이후에도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그 두 질문 사이에서 흔들린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핵무기의 미래를 걱정했고, 수소폭탄 개발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학과 정치가 얽히면서 한때 국가를 위해 일했던 과학자가 국가의 의심을 받는 위치에 놓인다.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인가 청문회가 시작되면서 과거의 정치적 관계와 인간관계가 하나씩 끌려나온다.

     

    과학 이야기를 하던 영화가 어느 순간 한 인간의 평판과 명예를 다루는 이야기로 바뀐다.

     

    그 부분이 답답했다.

     

    사람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 거대한 폭탄은 필요하지 않았다.

     

    질문과 기록, 정치적인 의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실제로 1954년 원자력위원회는 오펜하이머의 보안인가를 취소했다. 당시 위원회의 절차에는 문제가 있었고, 미국 에너지부는 2022년 이 결정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면서 당시 절차가 자체 규정을 위반했고 편견과 불공정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내려진 결정.

     

    그 시간을 한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이 대목에서 영화 속 책임의 의미도 조금 달라진다.

     

    처음에는 ‘폭탄을 만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후반부에 가면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그리고 그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만든 것이 나보다 오래 살아간다면

     

    영화 후반부에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가 나온다.

     

    이 장면은 실제 역사적 대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낸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생각하면 의미가 크다.

     

    과학은 인간이 몰랐던 세계를 열어준다.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식이 인간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그 지식을 누가 사용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잔인하게 경험했다.

     

    자신이 참여해 만든 핵무기는 전쟁의 무기가 됐고, 이후 더 강력한 핵무기와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을 막기 위해 더 무서운 무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무기가 너무 무서워서 사용하지 못한다.

     

    참 이상한 역설이다.

     

    <오펜하이머>의 무서움은 바로 이 연쇄작용에 있다.

     

    하나의 발견.

     

    하나의 선택.

     

    하나의 폭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수많은 선택들.

     

    로저 이버트 역시 이 영화가 개인의 결정과 사회적 선택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연쇄’의 구조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영화의 편집과 반복되는 이미지 역시 이런 연결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는 평가다.

     

    그래서 마지막의 오펜하이머는 이미 끝난 폭발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만든 힘이 앞으로 무엇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그 공포가 오래 남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이상하게 다른 장면보다 트리니티 실험 직후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폭발 장면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표정은 이상하게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 순간 무엇을 깨달았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요즘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도 가끔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AI처럼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보고 있으면 <오펜하이머>가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핵무기와 AI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위험의 성격도, 기술이 사용되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기술이 처음 만든 사람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좋은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만든 사람에게 있을까.

     

    사용한 사람에게 있을까.

     

    그것을 관리하는 사회와 제도에도 있을까.

     

    아마 하나만 고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오펜하이머>가 지금도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다.

     

    문제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왜 만드는지, 만들어진 뒤에는 누가 사용하게 될 것인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결과를 만든 사람 한 명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기술은 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사회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이라는 말은 무겁다.

     

    만든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고,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고, 그 과정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제도에도 책임이 있다.

     

    <오펜하이머>는 그 책임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에게 판단을 넘긴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하면서도 좋은 점이었다.

     

    처음 극장을 나왔을 때 기억났던 건 거대한 폭발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그 얼굴 뒤에 있던 질문이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었다면, 그 힘이 세상을 어디로 데려갈지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아마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것을 발견하고,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더 편리한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폭발은 몇 초 만에 끝났다.

     

    그 뒤에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것은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결과를 바라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만든 뒤 무엇을 선택했는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f3OuiXyg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