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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처음 손에 쥔 사람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직도 조금 낯설다.
MCU를 오래 봐온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방패 하나만 봐도 스티브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벤져스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한 발 앞으로 나가던 사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런 인물의 이름을 샘 윌슨이 이어받았다.
문제는 방패를 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샘에게 부족한 것은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스티브 로저스의 기억.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역할.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동료들의 시선까지.
마블 공식 소개에서도 샘 윌슨은 이미 공식적으로 캡틴 아메리카의 맨틀을 이어받은 인물로 소개된다. 이번 영화의 이야기는 바로 그 샘이 새롭게 주어진 이름으로 국제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상징적인 영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일일까.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견뎌내는 일일까.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이 질문을 샘 윌슨의 이야기 안에 넣어놓는다.
샘은 스티브 로저스를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내려고 한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외롭다.
방패를 들었다고 캡틴이 되는 건 아니니까
샘 윌슨에게는 초인 혈청이 없다.
이 차이가 이번 영화에서 은근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스티브 로저스는 슈퍼 솔저 혈청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이었다. 반면 샘은 비브라늄 슈트와 윙슈트를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치고 쓰러질 수 있는 인간이다. 버라이어티 역시 샘이 스티브와 달리 혈청으로 강화된 존재가 아니며, 방패와 윙슈트에 훨씬 더 의존하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점을 짚었다.
그래서 샘이 싸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방패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물리적인 무게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스티브의 기억과 사람들의 기대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샘과 스티브를 비교하게 됐다.
‘스티브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 생각이 몇 번이나 떠올랐다.
특히 샘이 방패를 들고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는 장면에서는 잠깐 스티브의 전투 장면이 겹쳐 보였다. 그런데 곧 생각이 바뀌었다. 스티브처럼 싸우는지를 보고 있는 동안 정작 샘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는 놓치고 있었다.
샘은 스티브처럼 초인적인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날개를 이용해 하늘을 움직이고, 방패의 각도를 계산하고, 자신의 몸을 이용해 공격을 피한다.
조금 더 영리하고, 조금 더 현실적인 방식이다.
그 순간부터 방패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스티브에게 방패가 신념의 상징이었다면 샘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영화는 샘에게 스티브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샘이 스티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하려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판단까지 돌아본다.
특히 호아킨 토레스와의 관계가 그렇다.
호아킨은 샘을 캡틴 아메리카로 대한다. 샘이 스티브만큼 강한지, 슈퍼 솔저 혈청을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믿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나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듯한 관계다.
샘이 방패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스티브의 모습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면서 그 이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대통령도 캡틴도 결국 한 사람이다
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대통령이 된 새뮤얼 로스의 모습도 흥미롭게 보인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처럼 보인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로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의외로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다.
딸 베티와의 관계다.
영화에서 로스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과거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과거의 헐크와 관련된 선택 때문에 딸과 멀어졌고, 그 상처는 국제정세를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보다 더 깊게 남아 있다. 로저이버트 역시 로스의 딸과의 관계와 과거의 분노가 그의 캐릭터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라고 분석했다.
이 부분이 의외로 마음에 남았다.
거대한 국제회의와 대통령 경호, 암살 음모가 이어지는데 정작 로스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가족과의 관계다.
사람은 이상하다.
밖에서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면서 정작 가장 약한 부분은 아주 사적인 곳에 남겨둔다.
그리고 로스가 레드 헐크가 되는 순간 영화는 그 감정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버린다.
레드 헐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이미 변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실제로 거대한 붉은 몸이 화면에 등장하니 생각보다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변신 자체보다 그 앞에 놓여 있던 로스의 감정이 더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화가 날 때 가장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오히려 가장 약한 부분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로스에게는 그것이 가족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샘이 로스를 힘으로만 제압하지 않는 선택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로스와 베티 사이에 남아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를 진정시키는 방식이다.
괴물로 변한 아버지를 멈추게 한 것은 더 강한 무기가 아니었다.
딸과의 기억이었다.
이 장면에서 샘과 로스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둘 다 거대한 이름을 짊어진 사람들이다.
한 명은 대통령이고, 한 명은 캡틴 아메리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강한 모습을 기대한다.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어려운 순간에도 답을 알고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흔들리는 사람이다.
샘에게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부담이듯, 로스에게 대통령이라는 이름 역시 자신의 감정을 숨기게 만드는 갑옷처럼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이 충돌하는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영웅 대 악당의 싸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쪽에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멈추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샘이 가진 힘은 상대보다 강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 부분이 스티브와 다른 샘의 색깔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시대보다 중요한 건 샘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
영화 후반부에는 아다만티움과 국제적인 갈등, 리더의 음모가 한꺼번에 등장한다.
티아무트의 시신이 남아 있는 셀레스티얼 아일랜드에서 아다만티움이 발견되고, 이를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다. 마블 세계관에서 아다만티움은 오랫동안 중요한 금속으로 사용되어 왔고, 영화는 이를 새로운 국제적 갈등의 소재로 끌어온다.
마블 팬이라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캐릭터와 세계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새로운 금속과 국제정세, 이사야 브래들리의 사건, 리더의 계획, 로스의 과거까지 많은 이야기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 결과 정작 샘의 감정선이 뒤로 밀리는 순간이 생긴다.
실제로 버라이어티는 영화가 <팔콘과 윈터 솔져>를 비롯한 많은 이전 이야기를 끌어오면서 관객에게 상당한 사전 지식을 요구한다고 지적했고, 로저이버트 역시 정치적 주제와 액션, 여러 서사가 제대로 결합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다만티움 자체보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샘에게 더 눈이 갔다.
세상은 계속 커진다.
새로운 물질이 발견되고, 국가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더 큰 위기가 찾아온다.
그런 상황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잊지 않는 것.
샘은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스티브의 방패를 바라봐온 사람에게 새로운 캡틴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상하게 샘에게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스티브와 비교하지 않고 샘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는 처음과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는 방패를 던질 때마다 ‘스티브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렸는데, 마지막에는 그런 비교를 거의 하지 않고 샘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변화가 이번 영화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부분이다.
샘에게 필요한 것은 스티브의 힘이 아니다.
스티브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사람을 지키는 이유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처음 떠올랐던 질문이 다시 남았다.
상징적인 영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일까, 사람들의 기대를 견뎌내는 것일까.
아마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자기 신념만 고집하면 사람들과 멀어질 수 있고, 모든 기대를 받아들이면 정작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잊어버릴 수 있다.
샘이 서 있는 곳도 그 사이 어딘가다.
그리고 어쩌면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의미도 그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스티브가 남긴 것은 방패 하나가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다.
샘은 그 태도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다시 해석한다.
그래서 샘의 캡틴 아메리카는 스티브의 다음 버전이 될 필요가 없다.
그저 샘 윌슨이면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방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누구에게 물려받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 방패를 들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완벽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러 이야기가 겹치면서 서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 있고, 샘 윌슨의 첫 단독 영화라는 기대에 비해 더 깊게 다뤄졌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특히 리더와 국제정세를 둘러싼 이야기는 샘의 성장이라는 중심축을 충분히 밀어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점은 실제 평론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된 부분이다.
그럼에도 샘이 자신의 이름으로 캡틴 아메리카의 자리에 서는 순간만큼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
스티브의 시대가 끝난 자리에 샘이 들어선 것이 아니다.
샘에게도 이제 자신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스티브의 방패처럼 보였던 물건이 마지막에는 샘의 방패처럼 느껴진다.
그 차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다.
방패의 주인은 바뀌었다.
이제 중요한 건 그 방패가 누구의 것이냐가 아니다.
그것을 들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샘 윌슨은 아직 그 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도 그렇게 완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남이 남겨준 상징을 물려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 안에 자신의 삶과 신념을 조금씩 채워 넣는 것.
스티브가 아니어도 캡틴 아메리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샘은 자신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