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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상하게도 액션 장면보다 포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봐온 캐릭터가 어느 순간 스스로 무대의 중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모습.
반갑기도 했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극장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도 포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이번에는 어떤 악당과 싸우지?”가 먼저 생각났을 텐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포가 더 이상 혼자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눈에 밟혔다.
<쿵푸팬더>의 포는 늘 부족한 팬더였다.
뚱뚱했고 실수도 많았다.
쿵푸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면서 용의 전사가 되겠다고 덤볐다.
그런 포가 어느새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강한 적을 물리치는 것만으로 포의 성장을 보여주기 어려워졌다.
<쿵푸팬더 4>가 흥미로운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번에는 포가 더 강해지는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해왔던 역할을 내려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이야기다.
드림웍스 역시 공식적으로 포가 용의 전사 역할을 계속 맡는 대신 평화의 계곡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그 전에 새로운 용의 전사를 찾아 훈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따라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익숙한 역할을 내려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포에게도 ‘다음 장면’이 필요해졌다
1편의 포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모습이 꽤 놀랍다.
그때 포는 용의 전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팬더였다.
제대로 뛰지도 못하면서 쿵푸 고수가 되겠다고 덤볐다.
주변에서는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포가 이제는 평화의 계곡을 지키는 중요한 인물이 됐다.
그런데 시푸는 포에게 새로운 역할을 이야기한다.
용의 전사 자리를 계속 지키는 대신 평화의 계곡의 영적 지도자가 되고, 새로운 용의 전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다.
평생 바라던 자리를 이제 와서 내려놓으라니.
더구나 포는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정말 많은 것을 겪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자신이 정말 용의 전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정상에 올라왔는데, 이제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한다.
이 부분이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회사에서 오랫동안 맡아온 일을 후배에게 넘겨줘야 할 때도 그렇고, 한 분야에서 인정받던 사람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
잘하던 일은 편하다.
사람들의 기대도 알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하면 인정받는지도 안다.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새로운 역할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포에게 용의 전사라는 자리는 단순한 직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주던 역할이었다.
그러니 그걸 내려놓는 일이 두려운 것도 이상하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일을 좋아해서 붙잡기도 하지만,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누구인지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붙잡기도 한다.
포가 쉽게 자리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적보다 더 어려운 상대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용의 전사가 아닌데도 여전히 포일까?’
영화는 이 질문을 꽤 재미있게 풀어간다.
포는 자신이 가진 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예전에는 직접 싸우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자신의 힘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 장면에서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포가 예전처럼 앞장서서 적을 때려눕힐 때는 익숙해서 마음이 편했는데, 새로운 역할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내가 알고 있던 포가 낯설게 느껴졌다. ‘저 자리를 정말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낯섦이 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포는 이미 성장했다.
그런데 성장한 사람에게도 또 다른 성장이 필요하다.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젠과 카멜레온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변화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여우 젠이다.
젠은 포와 정반대에 가까운 인물이다.
포가 정직하고 단순하다면 젠은 눈치가 빠르고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도둑으로 살아온 만큼 사람을 쉽게 믿지도 않는다.
둘이 처음부터 잘 맞을 리 없다.
그런데 함께 움직이면서 포는 젠에게 가능성을 발견한다.
젠 역시 포를 만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조금씩 경험한다.
솔직히 말하면 둘의 관계가 아주 깊게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로를 믿게 되는 과정이 조금 더 길었다면 마지막의 선택도 훨씬 묵직했을 것 같다.
로저 에버트 역시 젠과 포의 관계를 흥미로운 조합으로 보면서도, 이번 작품의 진행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젠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포가 지나온 길을 젠이 새롭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포에게는 우그웨이가 있었고 시푸가 있었다.
이제 젠에게는 포가 있다.
이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우그웨이가 포를 발견하고, 시푸가 포를 훈련시켰다면 이제 포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이 받았던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다.
영화에서 포가 젠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장면을 보면서는 잠깐 웃음이 났다. 예전의 포라면 누군가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모습 자체가 조금 어색했을 텐데, 이제는 그게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동안 포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굳이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영화 마지막에서 포는 젠을 새로운 용의 전사로 선택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그녀에게 전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드림웍스도 이 작품의 핵심을 포가 새로운 용의 전사를 찾아 훈련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카멜레온을 함께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다.
카멜레온은 다른 존재의 모습을 빼앗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쿵푸 능력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과거의 강자들이 가지고 있던 힘을 하나씩 움켜쥔다.
포와는 정반대다.
카멜레온은 남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려고 한다.
한쪽은 움켜쥔다.
다른 한쪽은 놓아준다.
이 대비가 이번 영화에서 생각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카멜레온에게는 자기 모습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많은 능력을 가져야 하고, 더 큰 존재가 되어야 한다.
포도 한때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용의 전사가 되어야 자신이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는 긴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 다른 답에 도착한다.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많이 늘리느냐보다,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하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는 것.
이 지점에서 카멜레온은 단순한 악당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영화는 이 부분을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빼앗는다는 설정에는 충분히 깊은 이야기를 붙일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와, 부족했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한 포를 대비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래도 카멜레온 덕분에 영화가 말하는 변화의 방향은 선명해진다.
성장은 더 많은 것을 가지는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데서 시작되기도 한다.
잘하던 일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1편의 포가 떠올랐다.
엉망진창으로 쿵푸를 배우던 팬더.
아버지의 국수 가게를 도우며 살던 포.
자신이 용의 전사가 될 거라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워하던 모습.
그 캐릭터가 이제는 누군가의 앞날을 고민한다.
조금 짠했다.
오래 좋아했던 캐릭터가 변하는 걸 보는 일은 늘 묘하다.
계속 같은 모습으로 남아주길 바라면서도, 그 캐릭터에게도 새로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감정이 조금 더 선명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이 이어질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깐 화면을 더 바라봤다. 포가 처음 용의 전사가 되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이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아마 오래된 캐릭터를 계속 지켜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때는 꼭 갖고 싶었던 직함이 있고, 인정받고 싶었던 역할이 있다.
어렵게 그 자리에 올라가면 내려오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역할이 오랫동안 나를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의 변화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
회사에서 내가 하던 일을 후배에게 넘길 수도 있고, 부모가 자녀에게 선택권을 넘겨줘야 할 수도 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인정받았던 사람이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 순간 가장 두려운 것은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
포도 처음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포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용의 전사라는 이름을 내려놓는 대신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젠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전한다.
젠 역시 새로운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성장이다.
내가 앞에 서는 것만이 성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을 앞에 세울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잘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내가 잘해온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는 것.
그때 비로소 다음 장면이 열린다.
이 부분을 보면서 예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하던 일을 설명해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직접 할 때는 몇 분이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려주는 일은 훨씬 답답했다. 빨리 내가 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 혼자 해냈을 때는 이상하게 내가 직접 해결했을 때보다 뿌듯했다.
포의 변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직접 해내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이 해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으로.
속도는 느려졌지만 역할의 무게는 오히려 달라졌다.
그래서 <쿵푸팬더 4>를 보고 난 뒤에는 액션보다 이 생각이 오래 남았다.
잘하던 일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그동안의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쌓아온 경험도, 실패도, 인정받았던 순간도 그대로 남는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포는 이제 혼자 싸우는 사람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힘을 발견하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간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하게 그 과정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작들에 비해 이야기의 깊이가 얕아졌다는 평가가 있었고, 액션과 코미디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포의 내적 변화가 충분히 묵직하게 쌓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나 역시 그 아쉬움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특히 젠과 포가 서로를 믿어가는 과정은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포가 자신의 자리를 젠에게 넘겨주는 순간도 훨씬 큰 감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남긴 질문 하나는 꽤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가장 익숙하고, 가장 잘하고, 가장 사랑했던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아쉽고 불안할 것이다.
괜히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포가 겪은 가장 어려운 수련도 바로 그것이었을지 모른다.
더 강한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없어도 세상이 계속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 뒤에도 자신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처음 떠올랐던 질문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포가 용의 전사를 그만두면 무엇이 될까?’가 궁금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다른 질문이 남았다.
나는 내가 잘하던 자리를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나라고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익숙한 역할을 벗어나면 한동안 허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포를 보면서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배운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포에게 그곳은 용의 전사의 자리 다음에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역할이었다.
그리고 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차례다.
어쩌면 다음 단계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잘하던 자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이 올라갈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렇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오히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다음 장면이 보일 수도 있다.
포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