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 모든 것을 빼앗긴 소녀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되찾았을까

mynote45009 2026. 9. 5. 08:57

목차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물이 흐르고, 과일이 열리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곳.

     

    <매드맥스> 시리즈를 생각하고 극장에 앉아 있으면 이런 풍경이 오히려 낯설다. 황무지의 노란 모래와 녹슨 쇠붙이, 거대한 엔진과 피로 물든 얼굴에 익숙한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초반의 초록색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무에 달린 과일도 눈에 남았다.

     

    별것 아닌 장면처럼 보이는데 이상했다. 물 한 방울과 먹을 것 하나가 생존과 연결되는 세계에서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풍요롭게 느껴졌다.

     

    그곳에서 어린 퓨리오사는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계가 무너진다.

     

    퓨리오사는 납치되고, 어머니를 잃는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쉽게 드러낼 수도 없는 삶이 시작된다. 살아남기 위해 낯선 사람들 틈에 숨어야 하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낮춰야 한다.

     

    집도 잃었다.

     

    가족도 잃었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어린 시절도 사라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시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복수일까.

     

    잃어버린 장소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를 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일까.

     

    조지 밀러는 이 이야기를 퓨리오사가 어린 시절 고향인 ‘풍요의 땅(Green Place)’에서 끌려간 뒤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긴 여정으로 만들었다. 밀러의 설명에 따르면 퓨리오사의 이야기는 10살부터 28살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 영화를 고향에서 떨어진 사람이 황무지를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이’라고 설명했다.

     

    <분노의 도로>가 달리는 동안 과거를 조금씩 짐작하게 만드는 영화였다면, <퓨리오사>는 그 과거 자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빼앗긴 소녀가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는 이미 완성된 인물이었다.

     

    삭발한 머리.

     

    한쪽 팔.

     

    얼굴에 묻은 먼지와 기름.

     

    거대한 워리그를 몰며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전사.

     

    왜 저렇게 강한 사람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그 모습 자체가 퓨리오사의 역사처럼 보였다.

     

    <퓨리오사>는 그 역사에 시간을 붙인다.

     

    아주 어린 소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하나씩 보여준다.

     

    납치당한 뒤 퓨리오사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남자들이 장악한 공간에서 눈에 띄지 않아야 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

     

    소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노동자로 살아가기도 한다.

     

    기계를 배운다.

     

    차량을 다루고 엔진을 이해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이 과정이 꽤 묵직하게 다가온다.

     

    퓨리오사는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전사가 된 것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강해졌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기술을 익혔다. 언제 공격해야 하는지보다 언제 숨을 죽여야 하는지를 먼저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퓨리오사는 조금씩 황무지의 사람이 된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다른 세계가 남아 있다.

     

    나무.

     

    물.

     

    과일.

     

    어머니.

     

    고향.

     

    영화를 보는 동안 초반의 초록색 풍경이 자꾸 떠올랐다.

     

    뒤로 갈수록 화면에는 모래와 쇠붙이가 넘쳐난다. 그럴수록 초반의 푸른색이 더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퓨리오사가 고향을 기억하는 장면은 단순한 추억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조지 밀러가 이 영화를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이’라고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돌아갈 곳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퓨리오사가 정말 되찾으려는 것은 고향이라는 장소 하나였을까.

     

    나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곳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것 아닐까.

     

    같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은 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크리스 헴스워스가 연기한 디멘투스는 처음부터 이상하다.

     

    바이크를 몰고 나타나는 모습부터 과장되어 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거창한 말을 쏟아낸다. 행동도 크고 목소리도 크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웃기지 않는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점점 선명해진다.

     

    디멘투스는 사람을 모으고, 힘을 키우고,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려고 한다. 헴스워스 역시 디멘투스를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사람인 동시에 지배와 통제를 위해 세력을 모으는 인물로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퓨리오사와 디멘투스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출발점에는 비슷한 상처가 있다는 점이다.

     

    둘 다 무언가를 잃었다.

     

    그런데 이후의 선택이 달라진다.

     

    퓨리오사는 잃어버린 세계를 향해 간다.

     

    디멘투스는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

     

    퓨리오사는 침묵한다.

     

    디멘투스는 끊임없이 말한다.

     

    퓨리오사는 자신을 숨긴다.

     

    디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과장한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디멘투스에게 황무지는 빼앗아야 할 세상이다.

     

    퓨리오사에게 황무지는 언젠가 벗어나야 할 세상이다.

     

    그래서 후반부 두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에는 단순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싸우는 것 이상의 감정이 생긴다.

     

    디멘투스는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

     

    퓨리오사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어떤 사람이 될지는 조금 다른 문제다.

     

    퓨리오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없애지 못한다.

     

    대신 그 경험을 이용해 살아남는 방법을 익힌다.

     

    그 과정에서 워리그가 등장한다.

     

    액션 장면을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차량의 크기와 속도에 눈이 간다. 그런데 퓨리오사의 과거를 알고 나면 시선이 조금 달라진다.

     

    왜 저렇게 차량을 잘 다루는지 알기 때문이다.

     

    왜 엔진과 기계에 집착하는지도 이해된다.

     

    왜 거대한 워리그에 몸을 싣고 황무지를 달리는 것이 그녀에게 중요한지도 보인다.

     

    차량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퓨리오사가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는 순간에도 그 생각이 따라붙는다.

     

    누군가에게 갇혀 있던 아이가 이제는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워리그의 질주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분노의 도로>의 액션이 끝없이 이어지는 추격의 쾌감에 가까웠다면, <퓨리오사>의 액션에는 그 질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이 들어 있다. 실제 평론에서도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보다 퓨리오사의 성장과 기원을 더 길게 들여다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나는 워리그 액션이 끝날 때마다 폭발보다 퓨리오사의 얼굴을 먼저 찾게 됐다.

     

    저 사람은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걸까.

     

    도망치기 위해서일까.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가기 위해서일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내 삶을 되찾는 것은 달랐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도 의외로 거대한 액션 장면이 아니었다.

     

    처음의 나무였다.

     

    어린 퓨리오사가 과일을 따던 모습.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그저 황무지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였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그 장면이 퓨리오사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퓨리오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있었다.

     

    가족이 있었고, 물이 있었고, 먹을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삶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사라졌다.

     

    이 사실이 퓨리오사의 이야기를 더 쓸쓸하게 만든다.

     

    아무리 복수에 성공해도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도 없다.

     

    사라진 고향을 예전 모습 그대로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삶을 되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은 아닐 것이다.

     

    퓨리오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살아남았다.

     

    기술을 배웠고, 자신의 힘을 만들었다. 믿을 사람을 만났고, 배신도 경험했다. 수많은 위협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았다.

     

    그렇게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의 퓨리오사는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다.

     

    나무를 기억하는 아이.

     

    물을 기억하는 아이.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아이.

     

    그 기억을 가지고 어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복수의 통쾌함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이런 생각에 가까웠다.

     

    이제야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구나.

     

    <분노의 도로>를 보고 퓨리오사를 강한 전사로 기억했다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보고 난 뒤에는 그 강함의 출발점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그녀는 처음부터 강했던 사람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너무 오랫동안 견뎠고, 살아남기 위해 하나씩 힘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되돌려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에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다시 갈 수 없는 장소도 있다. 아무리 원해도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삶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과거를 되찾지 못했다.

     

    대신 그 과거를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처음의 나무가 계속 생각났던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나무가 퓨리오사가 돌아가야 할 장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곳은 퓨리오사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지는 그녀가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의 엔진 소리는 과거로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한 질주도 아니다.

     

    이제는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스스로 정한 사람의 소리다.

     

    모든 것을 빼앗겼어도 삶의 방향까지 빼앗길 필요는 없다.

     

    퓨리오사가 끝까지 지켜낸 것은 고향의 모습도, 어린 시절도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어디로 끌고 갈지 결정할 힘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황무지에서 끝까지 빼앗기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것이었을 것이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NH0w02YKX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