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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올해 가장 기대하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부터 묘한 긴장감이 있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라는 이름이 한 화면 안에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도 극장에 갈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오래 마음에 남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극장을 나선 이후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장면들이 반복됐습니다. 처음에는 정치 스릴러처럼 보였고, 중반부에는 추격 액션처럼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과정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단순히 혁명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혁명의 이상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소모되며, 그 잔해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배경과 맥락: 이 영화가 지금 나온 이유
제가 직접 관람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은 "이 영화는 왜 지금 이 시기에 나왔을까"였습니다. 영화는 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구금소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단순히 사건을 발생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재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균열을 정면으로 끌어오는 설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초반 몇 분만 지나도 이 영화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관객은 이야기 속 인물들을 따라가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바라보게 됩니다.
영화 속 저항 조직인 프렌치 75 역시 단순한 이름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75mm 야포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이 조직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빠르고 강력한 공격, 그리고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하지만 영화는 그런 혁명적 낭만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조직이 내부의 균열과 불신 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암시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혁명을 다루면서도 혁명의 영웅담을 만들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이상은 찬란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배경 도시인 박탄 크로스의 설정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오히려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특정 지역을 지목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미국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 사건처럼 보이고, 동시에 전 세계 어느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다가옵니다. 특히 코인텔프로(COINTELPRO)와 같은 실제 역사적 사건이 언급될 때는 영화가 허구와 현실 사이를 절묘하게 오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역사 속 억압의 기억이 현재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관객은 과거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런 지점들이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영화 이상의 작품으로 만들어 줍니다.
혁명과 가족: 진짜 변화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영화를 정치 영화라고 규정하는 의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가족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과 그의 딸 윌라의 관계였습니다. 한때는 거대한 이상을 외치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던 인물이 이제는 술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씁쓸하게 다가왔습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확신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큰 감동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밥이 딸을 바라보는 장면들을 보면서 오히려 영화 속 모든 총격전보다 더 큰 긴장을 느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치던 혁명가가 결국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가슴 아팠습니다. 거대한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앞의 가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결코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숀 펜이 연기한 록조 역시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악역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모순과 불안이 드러납니다. 특히 권력 집단에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장면은 강렬했습니다. 그 순간 극장 안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저는 오히려 묘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보지 못한 채 끊임없이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현대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관찰처럼 느껴졌습니다.
세르지오 센세라는 캐릭터도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조연 정도로 생각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밥을 향해 "엘 그린고 사파타"라고 부르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묵직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상징인 사파타와 외부인을 의미하는 그린고를 결합한 표현 속에는 존중과 조롱, 신뢰와 의심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 영화는 혁명이라는 것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게 됩니다.
형식적 완성도: PTA는 왜 지금도 특별한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언제나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와 《팬텀 스레드》 역시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이번 영화는 그동안의 작가적 성취와 대중적 재미가 가장 균형 있게 만난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러닝타임이 길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고, 장면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강한 몰입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이번에도 놀라웠습니다. 음악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장면의 긴장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인물들이 침묵하는 순간마다 흐르는 음악은 마치 인물들의 내면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클 바우만의 촬영 역시 훌륭했습니다. 화려한 구도를 과시하기보다 인물의 얼굴과 시선에 집중하는 방식이 영화의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무엇보다 PTA 특유의 클로즈업 활용은 여전히 압도적이었습니다. 록조의 흔들리는 눈빛, 윌라의 복잡한 표정, 밥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사가 없어도 감정이 전달됩니다. 마치 인물들의 얼굴이 또 하나의 서사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거대한 정치적 담론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매우 사적인 감정의 기록처럼 다가옵니다.
평단의 높은 평가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은 종종 메시지에 치중한 나머지 영화적 재미를 잃어버리곤 하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등장하다가도 긴박한 추격전으로 전환되고, 다시 가족 드라마의 감정선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요소들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장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도 영화는 한순간도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는 통쾌한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혁명의 불꽃은 언젠가 꺼질 수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난 뒤에는 정치적 메시지보다도 한 아버지의 선택이 더 깊게 남았습니다.
올해 극장에서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곱씹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PTA의 최고작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여전히 고민이 남지만, 적어도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액션과 정치, 풍자와 드라마,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이 정도 밀도로 한 작품 안에 담아낸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특정 장면과 대사들이 계속 떠오른다는 사실이, 이 작품이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관람하지 않았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반드시 극장에서 경험해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끝난 뒤에도 오래 이어지는 질문 하나를 품게 되는 경험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