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만으로 기대를 품고 들어갔는데, 영화가 끝난 뒤 한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가 함께한 이 작품은 단순한 추격 액션이 아니라, 혁명의 이상이 어떻게 소진되고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배경과 맥락: 이 영화가 지금 나온 이유
제가 직접 관람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왜 지금 나왔을까"였습니다. 영화는 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구금소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설정 자체가 현재 미국 사회의 이민 정책 논쟁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출발점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저항 조직의 이름 프렌치 75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한 75mm 보병 야포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기서 야포란 기동성과 정밀도를 동시에 갖춘 포병 화기를 의미하는데, 이 이름 자체가 빠르고 격렬한 무력 저항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조직이 결국 내부 배신과 자멸로 이어진다는 걸 처음부터 암시합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건 배경 도시 설정입니다. 영화의 무대인 박탄 크로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인데, 이 선택이 꽤 지능적이라고 봤습니다. 특정 도시를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이야기가 미국 어느 곳에서든 벌어질 수 있다는 보편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정치 논쟁에 직접 휘말리는 위험도 피합니다. 코인텔프로(COINTELPRO)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도 등장하는데, 코인텔프로란 1960~70년대 FBI가 급진 정치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운영했던 비밀 프로그램으로, 특히 흑인 여성 운동가들에게 가혹하게 적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역사의 흔적을 현재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입니다.
혁명과 가족: 진짜 변화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영화를 두고 "정치 영화다"라고만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진짜 무게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밥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가 16년간 홀로 키운 딸 윌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거대한 이념을 내세우던 인물이 결국 술독에 빠진 채 딸 하나를 겨우 지키며 사는 모습은, 혁명의 이상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숀 펜이 연기하는 록조라는 캐릭터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짚습니다. 록조를 단순한 백인 우월주의 악당으로만 읽으면 이 인물의 입체성을 절반쯤 잃는다고 봅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권력 집단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하면서도, 정작 면접 자리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발언을 내뱉습니다. 이 순간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아이러니(irony)였습니다. 록조가 자신이 집착해 온 과잉된 남성성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말을 스스로 내뱉는 이 장면에서 캐릭터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세르지오 센세라는 캐릭터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처음에는 영화의 양념 같은 인물처럼 보였는데 뒤로 갈수록 그가 밥에게 "엘 그린고 사파타"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웃으면서도 뭔가 불편한 감각이 왔습니다. 이건 멕시코 혁명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이름에 백인 외국인을 지칭하는 스페인어 그린고를 붙인 표현인데, 애정 어린 조롱인 동시에 이 백인 남자가 진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의심이 담겨 있습니다.
형식적 완성도: PTA는 왜 지금도 특별한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전 작품들, 예를 들어 《데어 윌 비 블러드》나 《팬텀 스레드》도 형식적으로 탁월했지만, 이번 영화처럼 대중적 재미와 작가적 밀도를 동시에 잡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과 마이클 바우만의 촬영이 그 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클로즈업(close-up)을 영화의 지도처럼 사용하는 PTA 특유의 경향이 이번에도 뚜렷했는데, 록조의 표정 하나, 윌라의 눈빛 하나가 그 자체로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로튼 토마토 기준 비평가 점수가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는 것도 이 형식적 완성도에 대한 평단의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는 메시지 전달에 급급해 형식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슬랩스틱, 추격 액션, 멜로드라마, 가족 서사를 동시에 굴리면서도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그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란 부분이었습니다.
결말의 여운도 오래 남았습니다. 승리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혁명의 불꽃보다 아버지로서의 헌신이 더 오래 남는다는 감각, 그게 이 영화를 단순한 정치 영화가 아닌 매우 사적인 가족 영화로도 읽히게 만드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PTA의 최고작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조금 망설이겠지만,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영화라는 건 확실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어떤 이유로든 한 번쯤 극장에서 경험해 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