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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위키드를 보러 가기 전까지 오즈의 마법사를 "도로시, 허수아비, 노란 벽돌길 나오는 그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TV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기억은 있었지만, 세계관이나 인물 관계를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영화관에 앉아 스크린이 열리고 오즈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을 때도 저는 그저 새로운 판타지 뮤지컬 한 편을 보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던지는 대사, 특정 장면에서 관객들이 반응하는 포인트, 의미심장하게 연출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저는 그 절반 정도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전지식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실제로도 영화는 친절하고,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온 뒤 오즈의 마법사 설정과 세계관을 찾아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위키드의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원작을 알고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층위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화 위키드 사전지식 없이 봤다가 절반을 놓쳤습니다
위키드는 프리퀄(prequel)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프리퀄이란 기존 이야기의 시간적 이전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로, 위키드의 경우 1900년 발표된 소설 《The Wonderful Wizard of Oz》, 그리고 1939년 레전드로 평가받는 동명 영화보다 앞선 시간대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이 구조를 모르고 들어가면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복선이 왜 의미심장하게 처리되는지를 그냥 흘려버리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그저 설정 설명 정도로 여겼던 장면들이 있었는데, 원작을 알고 난 뒤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예를 들어 오즈 나라가 네 방위의 마녀들로 나뉜다는 설정,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라는 공간의 정치적 함의, 그리고 날개 달린 원숭이 군단처럼 원작에서 넘어온 요소들이 위키드 안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해석됩니다. 처음 관람 당시에는 "왜 이렇게 강조하지?"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사실은 원작 팬들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이후 전개를 암시하는 장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오즈 세계관에서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오즈 나라는 동서남북 네 방위로 나뉘며, 동쪽과 서쪽의 마녀는 사악하고 북쪽과 남쪽의 마녀는 착하다는 구도가 있습니다.
- 노란 벽돌길(Yellow Brick Road)은 어디서 시작하든 반드시 에메랄드 시티로 이어지는 상징적 경로입니다.
-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는 실제로는 사기꾼에 가까운 평범한 인간입니다.
- 은구두(Silver Shoes)는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마법 능력을 지닌 핵심 아이템입니다. 1939년 영화에서는 루비 슬리퍼(Ruby Slippers)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배경을 알고 위키드를 보면, 엘파바가 처한 상황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훨씬 선명하게 읽게 됩니다. 특히 마법사와 권력 구조를 이해한 뒤 다시 떠올려 본 몇몇 장면들은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감정을 안겨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한 오해를 받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보였던 서사가, 다시 보니 거대한 체제가 만들어낸 희생양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두 번째로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장면들을 복기했을 때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물이 그 운명으로 밀려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경험은 예상보다 훨씬 씁쓸하고 묵직했습니다.
오즈 세계관이 위키드에서 어떻게 뒤집히는가
위키드가 단순한 팬서비스가 아닌 이유는, 오즈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 서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원작에서 서쪽의 사악한 마녀(Wicked Witch of the West)는 그냥 악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기억합니다. 하지만 위키드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 악인은 정말 처음부터 악인이었는가?
제 경험상 이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강하게 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신시아 에리보(Cynthia Erivo)가 연기한 엘파바는 초록 피부라는 타자성(otherness)을 지닌 인물입니다. 타자성이란 사회적으로 주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낙인이 찍히고 배제되는 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엘파바의 서사는 바로 이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는 그녀를 특별한 영웅으로 포장하기보다, 사회가 불편해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보면서 판타지 속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현실 사회의 축소판을 보고 있다는 감각을 더 자주 받았습니다.
특히 엘파바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순간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외면하며, 또 누군가는 권력에 편승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쉽게 믿어지는가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위키드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맥스인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는 단순한 뮤지컬 넘버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사회가 규정한 악인의 역할을 거부하는 선언이자, 그 거부 자체가 또 다른 낙인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를 압축합니다. 솔직히 이 장면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유명한 넘버니까 인상적이겠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엘파바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극장 안의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화면에 집중하게 되었고,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숨을 참고 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존 추 감독의 카메라 워크가 무대적 에너지와 영화적 호흡을 동시에 잡아내면서, 마치 뮤지컬 공연의 현장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몰입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평단에서도 이 점은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위키드가 단순한 오리진 스토리를 넘어 권력이 서사를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다룬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룹니다.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가 맡은 글린다(Glinda) 역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착한 마녀'로 소비되는지를 보여주는 복잡한 캐릭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글린다가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선하지도 않고, 완벽하게 비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고, 더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영화적 완성도와 이 작품이 남긴 질문
위키드가 이 정도의 제작 규모와 연출 완성도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니버설의 새 로고 인트로부터 이미 자신감이 드러나는데, 그 자신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거대한 세트와 화려한 미장센이 펼쳐질 때마다 제작진이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뮤지컬 영화에는 스테이지-투-스크린 어댑테이션(stage-to-screen adaptation)이라는 고질적인 난제가 있습니다. 무대의 에너지를 카메라로 옮길 때 발생하는 공간감과 밀도의 손실 문제로, 많은 뮤지컬 영화가 이 벽에서 실패합니다. 위키드는 이 문제를 군무와 롱테이크, 그리고 스펙터클한 세트 디자인으로 상당 부분 돌파했다고 봅니다. 제 경험상 무대 뮤지컬 특유의 라이브감이 이 정도로 살아있는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특히 대규모 군무 장면에서는 단순히 화려하다는 감상보다 실제 공연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졌고, 카메라가 배우들의 감정을 가까이 포착할 때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몰입감이 살아났습니다.
뮤지컬 원작 자체도 흥행 기록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2003년 초연 이후 현재까지 공연 중인 위키드는 역대 브로드웨이 흥행 순위에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로, 장기 흥행의 핵심 요인으로 "인물 간 관계의 보편성"이 꾸준히 언급되어 왔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수많은 관객들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화려함 너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즈의 배경지식을 알면 감상이 깊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입니다. 경쟁과 우정, 선택과 배제가 교차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즈 세계관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울립니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오래 남았던 것도 거대한 세계관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감정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옳은 선택을 하고도 악인이 되고, 누군가는 사랑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순이야말로 위키드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키드를 아직 못 보셨다면, 오즈의 마법사 줄거리를 간단히 훑고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의 밀도가 달라집니다. 이미 보셨다면, 오즈 원작의 디테일을 확인하고 다시 보시는 걸 권합니다. 분명히 처음과 다른 영화가 보일 것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화려한 판타지 뮤지컬 한 편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릴수록 이 작품은 "누가 악인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영화란 결국 극장을 나선 뒤에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위키드는 제게 분명 그런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