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판타스틱 4는 이미 두 번이나 실사화에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라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거라는 확신이 없었거든요. 오히려 개봉 전까지는 "이번에도 결국 아쉬운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더 컸습니다. 마블이 최근 몇 년 동안 보여준 행보 역시 기대보다는 걱정을 키우는 요소였습니다. 작품 수는 늘어났지만 예전처럼 극장을 나서며 가슴이 뛰는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저 역시 한때 MCU를 열정적으로 따라가던 팬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드디어 이 팀이 자기 옷을 제대로 입었구나"였습니다. 단순히 재미있었다는 차원을 넘어, 왜 판타스틱 4가 마블 코믹스의 시작을 상징하는 가족인지, 그리고 왜 수많은 팬들이 오랫동안 이들의 MCU 합류를 기다려왔는지를 납득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성만큼은 명확했고, 마블이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감각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 레트로 퓨처리즘이 이 영화를 살렸다
일반적으로 MCU 신작이라고 하면 현란한 디지털 배경과 과도한 CGI가 먼저 떠오릅니다. 최근 작품들은 기술적으로는 놀라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색감과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개성을 잃어버린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달랐습니다. 1960년대 레트로 퓨처리즘을 미장센의 중심에 두었는데, 여기서 레트로 퓨처리즘이란 과거 시대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예술 양식입니다. 쉽게 말해 60년대 SF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색감과 디자인 언어를 현대 블록버스터에 이식한 것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선택이 단순한 감성 취향이 아니라 굉장히 전략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입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건 익숙한 MCU의 풍경이 아니라 낯설지만 매력적인 세계였습니다. 반짝이는 금속 재질의 건축물, 미래를 상상하던 과거의 상상력이 담긴 기계들, 그리고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진 도시의 풍경은 마치 오래된 SF 아트북을 한 장씩 넘기는 듯한 기분을 안겨줬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이 세계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공간 자체가 매력적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이야기보다 먼저 세계가 관객을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근 마블 영화들이 세계관 연결에 지나치게 집중하면서 개별 작품의 시각적 개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이어졌는데, 이 영화는 독립적인 지구인 어스 828(Earth-828)을 배경으로 아예 MCU의 기존 문법에서 벗어납니다. 어스 828이란 타노스의 핑거스냅 사건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평행 지구를 의미합니다. 덕분에 어벤져스와의 관계를 설명하느라 서사가 낭비되는 일이 없었고, 이 팀만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후속편도 아니고, 다음 작품을 위한 예고편도 아닌, 판타스틱 4 자체를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 측면에서도 최근 마블 영화 중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영화 속 공간, 소품, 색채 등 시각적 환경 전반을 설계하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아이맥스(IMAX) 인증 카메라로 촬영된 만큼 화면의 밀도 자체가 달랐고, 특히 갤럭투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부터 화면비가 1.43:1로 확장되면서 관객을 압도하는 연출이 펼쳐졌습니다.
저는 아이맥스관에서 관람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압도된다는 표현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존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극장의 벽면까지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 순간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마시게 되더군요. 단순히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주는 공포와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을 처음 마주했을 때, 컨택트에서 우주적 미지의 존재를 바라봤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종류의 전율이었습니다.
갤럭투스는 위협적이었지만, 서사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에서 갤럭투스의 존재감은 상당했습니다. 지금까지 MCU에 등장한 우주적 존재들, 예를 들어 셀레스티얼 아리센과 비교해도 훨씬 더 원초적인 압도감을 보여줬고, 개인적으로는 아리센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가 그의 존재를 설명하기보다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관객은 갤럭투스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게 됩니다.
음악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마이클 지아치노의 스코어(Score)가 우주적 공허함과 긴장감을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특히 갤럭투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음향과 음악, 비주얼이 완벽하게 결합하며 강한 몰입감을 만들어냅니다. 극장의 사운드가 몸을 울리는 순간마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재난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만 갤럭투스의 존재감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과 별개로, 캐릭터 자체가 얼마나 깊이 있게 묘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비주얼 스케일은 압도적이었지만 그의 철학이나 동기가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채 위협의 도구로 소비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원작 갤럭투스는 단순한 악당이 아닌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설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서는 존재이기에 더 흥미로운 캐릭터인데, 이번 작품은 그 매력을 충분히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영화가 그 지점까지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단순한 블록버스터를 넘어 훨씬 묵직한 SF 서사로 기억됐을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캐릭터는 오히려 실버 서퍼였습니다. Julia Garner가 연기한 실버 서퍼, 즉 샬라발은 갤럭투스의 전령으로 등장하지만 단순한 빌런이 아닌 비극적 사연을 가진 존재로 그려집니다. 차갑고도 슬픈 감정선이 꽤 설득력 있었고, 등장할 때마다 묘한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화려한 액션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침묵과 표정, 그리고 선택의 순간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가장 많이 떠오른 인물은 갤럭투스가 아니라 실버 서퍼였습니다.
판타스틱 4 MCU 안착
저는 이 영화가 단순한 캐릭터 소개 편, 즉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한 들러리 역할에 그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The Fantastic Four: First Steps는 MCU 멀티버스 사가의 다음 챕터인 Avengers: Secret Wars를 위한 징검다리 그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영화 속 평화 협정 장면에서 라트베리아(Latveria)라는 국가가 등장합니다. 라트베리아란 마블 원작 코믹스에서 닥터 둠의 지배 아래 있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로, 범죄율 0%, 빈곤율 0%를 구현하지만 강압적 통치로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둠 자체를 상징하는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번 영화에서 그가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앞으로의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극대화합니다. 극장 안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하자 주변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느껴졌고, 저 역시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edro Pascal의 리드 리처드는 팀의 지적 중심을 설득력 있게 잡아줬고, 수 스톰은 팀 전체를 감싸는 감정의 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네 명이 정말 가족처럼 보였다는 점입니다. 이전 실사화들이 늘 놓쳤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능력보다 관계가 먼저 보이고, 갈등보다 애정이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서 위험에 처했을 때도 단순한 슈퍼히어로 팀이 아니라 가족이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해외 주요 평단이 배우들 간의 케미스트리와 Matt Shakman 감독의 감성적 연출을 높게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닝 타임 114분은 딱 적당했습니다. 기원 장면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팀이 이미 가족으로 기능하는 시점에서 시작한 선택도 영리했습니다. 다만 그 결과 일부 캐릭터의 감정 축적이 충분하지 않아 후반의 드라마가 조금 빠르게 소비되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했다면 몇몇 감정 장면은 훨씬 깊은 울림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마블의 대반전"이라기보다는 재정비를 위한 안정적이고 품격 있는 첫걸음에 가깝습니다. 화려한 혁신으로 세상을 뒤집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길을 잃고 방황하던 시리즈가 다시 중심을 찾기 시작했다는 신호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액션 스펙터클보다 관계와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 연출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저는 이 선택이 이 팀의 정체성에 가장 솔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판타스틱 4는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번 작품은 그 본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반가웠고, 그래서 더 기대하게 됐습니다. 닥터 둠과 멀티버스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다음 단계가 기다려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랜만에 마블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 작품, 그것이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내린 가장 솔직한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