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은 혼자 뉴욕을 날아간다. 겨울이다. 빌딩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그 위를 스파이더맨 한 명이 거미줄을 쏘며 건물 사이를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이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일까. 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 생각이 먼저 든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한 화면에 등장했던 순간도 짜릿했다. 과거의 빌런들이 다시 나타나는 장면도 반가웠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토비 맥과이어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던 기억도 선명하다. 나 역시 그 순간 피식 웃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스파이더맨이 시간이 훌쩍 지난 뒤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
바다는 혼자 건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배를 타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앞에는 물뿐이고, 뒤에는 지나온 물결만 남는다. 방향을 정하는 사람도, 노를 젓는 사람도 결국 배 안에 있는 누군가의 몫이다. 그래서 모아나가 다시 바다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궁금했다. 1편에서 이미 자신의 길을 찾은 아이였다. 테 피티의 심장을 돌려놓았고, 부족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넘어섰다. 자신들의 뿌리가 항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렇게 큰 모험을 끝낸 모아나에게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의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모아나는 선조들의 부름을 받고 다시 먼 바다로 향한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마우이와 새로운 선원들을 만나고, 오랫동안 ..
창문을 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이었나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답답하면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쐰다. 잠깐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평소에는 너무 당연해서 이런 일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를 보고 나니 달라졌다. 영화 속 가족에게 창문은 세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자신들을 갈라놓는 경계다. 밖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것도 보인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느껴진다. 그런데 나갈 수 없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아끼고, 물을 모으고, 굴뚝을 이용해 바깥의 동물을 잡고, 집 안의 흙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그렇..
초록색 피부를 가진 소녀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놀랐다.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불길하다고 했다. 아이가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저 아이는 우리와 다르다.’ 이 한마디가 이상하게 무섭다. 사람은 낯선 존재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고, 이유를 만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이야기를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나쁜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나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묻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의 엘파바가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서쪽의 사악한 마녀. 초록색 피부, 검은 모자, 빗자루. 어린 시절부터 너무 익숙하게 보아온 이미지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는 그 ..
피터 파커는 자꾸만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토니 스타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학교에서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된 뒤에도 마음은 편하지 않다. 거미줄을 타고 건물 사이를 날아다닐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신이 난다. 그런데 토니에게 연락이 오지 않으면 금세 초조해진다. 자신에게 더 좋은 슈트를 주기를 기다리고, 더 큰 임무를 맡겨주기를 기대한다.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엽다. 아직 열다섯 살이니까. 어른들이 보기에는 뉴욕을 누비는 슈퍼히어로지만 피터에게는 학교생활도 중요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어벤져스와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처음 손에 쥔 사람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직도 조금 낯설다. MCU를 오래 봐온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방패 하나만 봐도 스티브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벤져스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한 발 앞으로 나가던 사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런 인물의 이름을 샘 윌슨이 이어받았다. 문제는 방패를 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샘에게 부족한 것은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스티브 로저스의 기억.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역할.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동료들의 시선까지. 마블 공식 소개에서도 샘 윌슨은 이미 공식적으로 캡틴 아메리카의 맨틀을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상하게도 액션 장면보다 포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봐온 캐릭터가 어느 순간 스스로 무대의 중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모습. 반갑기도 했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극장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도 포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이번에는 어떤 악당과 싸우지?”가 먼저 생각났을 텐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포가 더 이상 혼자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눈에 밟혔다. 의 포는 늘 부족한 팬더였다. 뚱뚱했고 실수도 많았다. 쿵푸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면서 용의 전사가 되겠다고 덤볐다. 그런 포가 어느새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강한 적을 물리치는 것만으..
3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왔다. 이상하게도 가장 강렬했던 건 폭발 장면이 아니었다. 엄청난 소리와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던 순간보다, 그 뒤에 남은 한 사람의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말도 거의 없고 움직임도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던 얼굴. 집에 돌아와서도 그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는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폭탄의 위력보다 한 가지 질문이 더 무겁게 남는다. 인류를 발전시킨 지식이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다면, 그 지식을 만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괴물 같은 무기를 만들어낸 사람일까. 아니면 시대가 요구한 일을 수행한 과학자였을까. 둘 중 하나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그 둘 사이에서..
맛있는 음식이 잔뜩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를 틀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와 바삭하게 구워지는 빵, 치즈가 녹아내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화면에서는 계속 음식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음악은 경쾌하고 화면은 따뜻하다. 등장인물들도 어딘가 사랑스럽다. 영화를 보다가 결국 냉장고 문을 한 번 열어봤다. 특별히 먹을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화면에서 쿠바 샌드위치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나니 뭔가 하나라도 꺼내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맛있는 영화를 기대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음식보다 오래 남은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을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용기가 있을까? 생각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우리는 잘하는 일..
어릴 때는 부모가 알려주는 세상이 거의 전부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아직 직접 겪어본 일이 많지 않으니 부모의 말을 믿는 편이 훨씬 편하다. 세상을 먼저 살아본 사람이 알려주는 길이라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안전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 의 히컵도 그런 아이였다. 바이킹이 사는 버크섬에서는 드래곤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스토이크는 강한 바이킹이었고, 아들에게도 그런 모습을 기대했다. 실제로 스토이크는 버크를 지키는 강인한 족장이자 전사로 그려진다. 하지만 히컵은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힘도 부족하고 싸움도 서툴다. 대신 무언가를 만들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히컵은 누구도 잡지 못했던 드래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