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정작 한 소년의 두려움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개봉 전부터 "종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흥행작"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솔직히 저는 그보다도 과연 얼마나 진심 어린 감동을 줄 수 있을지가 더 궁금했습니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 소년이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익숙한 영웅담 정도를 예상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이야기였기에 결과도 알고 있었고, 전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영화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장면보다, 거인을 마주하기까지 한 소년이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흔들림을 견뎌냈는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
1948년 제주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위해 외웠던 숫자도 기억하고 있었고, 역사 시간에 한두 번쯤은 들어본 사건이라는 정도의 인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은 어디까지나 활자 속 정보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공포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했는지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화 을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단순히 한 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되어 온 역사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
7,880만 뷰. 16살 소년이 방구석에서 만든 9분짜리 유튜브 영상이 기록한 숫자입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잠깐 화제가 되고 사라질 콘텐츠라고 생각했던 영상이 결국 A24의 장편 영화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호기심이 꽤 컸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이 공간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 저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을 본 것도 아니고,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와 소리를 지르게 만든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한동안 굳어 있었습니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장에서 나오면서 이상하게도 한동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보통 정말 좋았던 영화라면 "재밌었다", "잘 만들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인데, 어떤 작품은 그런 감탄보다 먼저 "조금만 더 다듬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저에게 영화 〈눈동자〉는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분명히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긴장하며 몰입할 수 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있었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마음속에는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좋은 재료와 훌륭한 배우들을 가지고도 마지막 한 걸음을 채우지 못한 듯한 느낌. 그래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영화 눈동..
전 세계 누적 흥행 수익 17억 달러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긴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가 거의 10년 만에 실사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솔직한 마음은 설렘보다 걱정에 가까웠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완성형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을 다시 만든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디즈니의 여러 실사화 작품들을 보며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그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게 경험했기에,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기대치를 낮추게 되었습니다. 극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마음 한편은 복잡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느꼈던 바다의 설렘과 모험의 두근거림을 아직도 생생하게 ..
악당을 쓰러뜨리지 않고 끝나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모아나를 처음 봤을 때 그 질문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운 바다와 디즈니 특유의 화려한 음악, 그리고 시원한 모험 이야기를 기대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항해하는 장면과 귀를 사로잡는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제가 받은 감정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모험 영화처럼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선언하는 통쾌함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 따뜻한 울림이 밀려왔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모아나가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이해와 공감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아..